『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고

7년 간의 오독

by 시지프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니체를 좋아했고 니체의 사상을 조금 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고, 내가 니체를 오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게 그의 글에서 상처 입은 분노만 보였던 걸까? 내가 그래서겠지.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타인에게 투영한다는 통찰 또한 그의 글에서 심심치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차라투스트라](너무 길어서 이렇게 줄이겠다.)의 문체와 비유가 너무 어려워서 주로[도덕의 계보], [선악의 저편]을 읽었다. 그런데 최근 들뢰즈, 카뮈, 사르트르의 사유를 접하고 다시 니체를 읽으니 정말 개안한듯이 글이 읽혔다. 민음사 역본 기준 571쪽의 분량을 자랑하는 책인데, 이틀만에 흐름을 타면서 읽었다.

내가 무엇을 오독한 것일까?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게 '신'이 되라고 요구한 적이 없지만, 나는 그의 그의 서술을 읽으면서 '결국은 그 또한 '주인-노예'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사용하는 게 아닌가?'라는 반감이 들었고, 결국에는 '선악을 창조하라는 게 신이 되라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어느 순간부터 니체를 안 읽게 되었다. 그러나, 왜 그가 [차라투스트라]를 자신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낸 책이라고 말하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순진무구한 웃음'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무모순율'이라는 고전적 잣대를 가지고 그의 사상을 평가하려들면 그의 사상은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모순적이다. 자아의 통합을 요구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꾼다. 자신의 판단 기준을 타인이 추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자신마저 던져버리라고 반복하여 말한다. 니체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가 이 지점에서 저 지점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리좀식' 독해를 하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해석을 적어보겠다.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사랑한다. 그는 1, 2, 3, 4부를 걸쳐 계속 '인간에 대한 사랑, 동정심 - 인간에 대한 경멸, 고독에 대한 열망'을 반복한다. 그는 '인간'이다. '극복되어야 할 무언가'로서 살아가는 인간은 영원회귀에 갇혀 허무주의, 즉 인간에 대한 극도의 경멸과 극도의 고립에 빠질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동정심을 가진 성직자와 양치기'들은 '부조리한 인간'의 약점을 이용한다. 이 가엾은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이 가진 심연의 깊이를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성직자와 양치기들이 하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성직자와 양치기들은 르상티망에 사로잡혀 '부조리한 인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사랑으로 포장하여 부조리한 인간의 약점을 이용한다.

이 지점에서 '부조리한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된다. 초인을 자처하는 차라투스트라 또한 정말 깊은 우울에 빠지기도 하였다. 니체가 제시하는 윤리는 힘이 항상 충만한 ''을 원하지 않는다. 그의 윤리는 '웃음'이다. '삶이 원래 그러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이라고 웃으면서 가볍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니체의 이중적 여성관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니체는 자신의 상처로 여성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그의 글을 통하여 알 수 있었지만, 결국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니체에게 지는 것이다. 니체를 읽는 독자는 니체마저 통쾌한 웃음으로 경멸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를 신으로 모신다면, 그것은 또다시 본래적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즐거운 독해'에 사로잡혀 이틀 밤을 새며 완독하였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내 고난에 해답을 주는 듯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웃어라.', '넌 인간이다.', '다만, 너는 극복되어야 할 그 무언가이다.', '지금, 여기를 살기보다 미래를 현재에 불러와라.', '가볍게 대지에 너를 맡겨라.', '네 심연 속의 불꽃을 찾아 불태워라.', '하지만 너는 무너질 것이다, 아니 무너져야만 한다.', '그 고난이 어떻든 가볍게 털고 일어나라.', '회복의 시간 또한 필요하다. 가끔은 고독해져라.' 등 내가 각종 책에서 느낀 점들을 요약해서 강렬한 문체로 느낄 수 있었다. 한 인간의 처절한 고뇌가 느껴지는 글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명랑한 문체로 글을 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체, 차라투스트라 또한 경배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인상 깊어서 사진을 찍었던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닫겠다.

불행 때문에 바보가 되기보다는 행복 때문에 바보가 되는 것이 낫다. 절름거리며 걷기보다는 둔탁하게라도 춤추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나에게 지혜를 배우라. 가장 나쁜 것조차 두 가지의 좋은 이면(裏面)을 가진다는 것을 알라.
이 세상에 존재한 이후로 인간은 너무도 즐길 줄을 몰랐다. 형제들이여,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이다!
의사여, 그대 자신부터 고치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대의 환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스스로 치유하는 것을 직접 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환자에게 최상의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 진리를 사랑하는 자여, 이처럼 마구잡이로 몰아세우는 자들을 질투하지는 말라! 지금까지 진리가 마구 몰아세우는 자의 팔에 매달린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이 두서없는 자들에게서 벗어나 그대의 안식처로 돌아가라. 오직 시장에서만 '긍정인가?' 아니면 '부정인가?'라는 물음에 시달릴 뿐이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워야 할 때다. 이제는 드높은 희망의 싹을 심을 때다. (중략) 그대들에게 말하거니와,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인간은 자신 속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슬프다! 인간이 더 이상 별을 낳지 못하는 때가 오겠구나! 슬프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경멸스럽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시대가 오고 있다!
가까이 있으면 그대가 두렵고, 멀리 있으면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달아나면 나는 이끌리고, 그대가 찾으면 나는 멈칫한다. 괴롭다. 하지만 나는 그대를 위해 기꺼이 그 어떤 괴로움도 참아 오지 않았던가! 그대가 차갑게 대하면 마음에 불이 붙고, 그대가 증오하면 유혹을 느끼고, 그대가 달아나면 묶여 버리고, 그대가 조롱하면 감동받는다.
아 인간이여! 주의를 기울이라!
깊은 한밤중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잠들어 있었다.
깊은 꿈에서 나는 깨어났다.
세계는 깊다.
낮이 생각한 것보다 더 깊다.
세계의 고통은 깊다.
쾌락은 - 마음의 고통보다도 더 깊다.
고통은 말한다. '사라져 버리라!'
하지만 모든 쾌락은 영원을 원한다.
- 깊디깊은 영원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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