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에서
우리는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죽음으로 앞질러 달려가 봄’의 경험에서 나를 끊임없이 부르던 외침은 ‘철학함’과 ‘사랑함’이었다. 내 삶은 세속의 일상성에서는 이를 성취하기 어렵다는 점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여주었다. 우울(상세불명의 우울 에피소드)과 불안(사회 공포증) 속, 나를 괴롭혔던 건 삶을 찢어놓는 긴장과 괴리감이었다, 진리는 그 괴리를 넘어선 곳에 ‘예외와 우연’의 형태로 내재한다. 영원은 가끔, 우리 삶에 나타난다. 기억 속에 ‘강렬함’으로 기록된 영원은 ‘갑자기’ 삶에 ‘섬뜩함’의 형태로 엄습한다. 그 순간, 나는 무(無)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교회도, 동아리도, 학교도, 학원도, 그 어떤 사람도 ‘진리’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본질, 진리는 작위에 의해 드러나지 않는다. 진리가 우연히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었을 뿐이고, 우리는 진리를 체험할 뿐이다. 정신분석적 관점에 따르면, 우울과 불안은 근원적으로 자아의 ‘분열’에 근거를 둔다. 우울은 상실에 집착하여 깊이 가라앉게 한다. 불안은 무(無) 앞에서 무엇이라도 잡고 싶음에도 무엇도 잡을 수 없게 한다. 어떤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자아가 통합될 때 우울과 불안은 사그라든다. 그러나, 그건 ‘사그라듦’이지, ‘없앰’이 아니었다. 나를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어떤 강렬함은 은폐될 뿐, 사라지지 않았다.
진정한 괴로움 속에는 진정한 행복도 있다. “행복감이란 비애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사금 같은 것이 아닐까?”(다자이 오사무, “사양”) 세속은 괴로움을 은폐하는 길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철학은 묻는다. ‘과연 그럴까?’ 은폐는 순화된 억압일 뿐, 해소가 아니다. 현대 철학자들은 묻는다. “분열 ‘그 자체’를 긍정해서는 안 되는가?” 정신의학은 답한다. “일상생활에 지장만 안 가면 됩니다.”라고. 한 인간은 그 자체로 혼돈이고, 다자성이다. 어떤 사람 그 자체를 ‘파악함’이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아이러니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다가올 수 있는 법이다. 안정성이라는 약이 어떤 사람에게는 독이 되지는 않을까[안정의 역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기쁨이 아니라 불안의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대체할 다른 우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불안. 물신(物神) 숭배가 횡행하는 오늘날, 이 불안은 불행히도 적중하였다. ‘돈이 최고야’, ‘돈이면 다 돼’라는 말이 일종의 진리처럼 통하는 세속에서 사람들은 돈을 행복의 징표라고 ‘신앙한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무(無)를 유(有)로 채우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고, 무신론자라 자처하는 이들도 종교적 성격을 띤 행위를 한다. 부조리함을 인정하지 않고 물신을 숭배할수록, 분열은 심해져 간다. ‘부조리를 인정함’, ‘반항함’은 자유의 전제이다.
선악 판단은 필연적으로 반례를 낳고, 분열을 낳는다. 변증법은 세계의 근원적 모순됨으로 인해 무한히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사랑으로 행해지는 것은 항상 선악의 저편에서 일어난다.”(니체, “선악의 저편”) 영화 “인터스텔라”의 결말이 시사하는 바를 초등학생 때는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탁월한 결말이다. 유교의 인(仁)은 사랑이다. 불교의 자비도 넓은 의미에서 사랑이다. 그리스도교의 아가페도 사랑이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다자이 오사무, “사양”) 새로운 윤리는 참된 사랑의 구현으로 낡은 윤리에 반항해야 한다.
혹자는 ‘이상주의자’라 할 수도 있을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막에서 북극성이 있기에 길을 찾을 수 있듯, 세상에서는 이상이 있기에 길을 찾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이상주의자를 향한 비난은 언제나 있었고, 도구가 지배하는 사회가 될수록 이 경향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들’의 냉소가 마음을 찢어도, 그들에게도 이상은 늘 잃어버린 마음으로 있을 것이며 그들마저 사랑해야 진정한 윤리가 될 수 있으리라. 선과 악을 넘어서, 손해와 이익을 넘어서, 차안과 피안을 넘어서. 너와 나를 넘어서, 적과 친구를 넘어서, 행복과 불행을 넘어서… 진리의 장(場)에서 개인은 참된 개별자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