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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톱니바퀴 Mar 20. 2023

조선왕조의 액션 로그

난 업무 특성상 데이터를 보는 일이 잦았다. 시도때도 없이 SQL을 날리고 분석하며 시각화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DB 오류에 대응하기 위해 데이터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장담하건데 카드사와 간편결제 회사는 그 어떤 회사보다 많은 정성/정량적 데이터를 보유한다. 그 어떤 회사들보다도 데이터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곳이며 굉장히 이른 시기부터 데이터를 적재하고 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회사들이 역설적이게도 데이터에 대한 원천적 고찰부터 시작해 철학 있게 데이터를 다뤄왔는지를 묻는다면 확언하기 어렵다. 재무, 인사, 감사, 영업, 마케팅과 같은 다른 업무 분야에 대해서는 사회적이고 발전적인 고찰이 비교적 많이 이뤄지고 있는 것에 대조적이다. 데이터는 통계학과 컴퓨터공학, 즉 학문으로서의 토대는 오히려 잘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회사의 경영에서 데이터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회사를 '경영'하고 '운영'하는 데의 재무나 영업 등의 고전적 업무 역할에 비해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은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가? 이러한 고민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라면, 어떤 회사의 경영자는 데이터를 추출하고 분석하고 관리하는 사람은 단순히 '경영관리 숫자 자판기'로 여기게 된다. "야, 이거 얼마나 되는지 숫자 좀 뽑아봐. 얼마 안 걸리지?"


우리나라의 역사 속 조선은 그야말로 '기록의 국가'였다. 심지어 건국 초기에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기록했다는 일화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내용이다. 좀 다르게 말하자면, 정치적 행동에 대한 액션 로그(Action Log)를 전부 데이터화한 것이다. 조선의 국정을 운영하면서 해를 거듭하며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왕의 행동을 제외하고 중요한 내용을 우선적으로 기록한 것 또한 당시에 아주 비쌌던 '종이' 즉 디스크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로그 적재의 최적화를 꾀했다고 보면 사실상 DB를 관리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조선왕조실록의 4부 인쇄 후 전국 각지 분산 배치는 어쩌면 2014년 삼성카드 데이터센터 화재, 2022년 카카오 먹통 사태까지 예견한 선조들의 백업(Back-up) 작업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그토록 철저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졌던 기록은 그 시대에 어떤 가치를 지녔는가?


왕조를 거치며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실록은 왕조차도 볼 수 없는 역사의 기록이었다. 그 기록은 말 그대로 분석하여 활용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대의 왕이 어떻게 실정(失政)했고어떻게 극복하였는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정책을 성공하였는가 등을 반면교사하거나 온고지신했는지를 파악하지는 못했던 한계가 있지는 않았을까. 오늘날에 이르러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정치사 뿐만 아니라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값진 유산이 되었으나, 조선인들에게 조선왕조실록은 말 그대로 로그 데이터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다시, 우리가 다니고 있는 회사 혹은 속한 조직에서의 데이터는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또, 어떤 가치를 지녀야 하는가. 우리의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의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최근에 등장한 그로스해킹(Growthhacking)이라는 개념은 이 철학의 결과물 중 하나다.


고전적으로 데이터는 '의사결정을 지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어 왔다. 물론 이 명제가 틀린 것은 아니나, 확장한 개념에서의 데이터는 의사결정을 지원함은 물론 시기에 따라 현재의 상황을 진단하고 더 빠르거나 더 안정적으로, 혹은 더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함이 맞다. 프로젝트의 추진, 업무 제휴 등의 전사적 의사결정을 지원하면서도 현재의 서비스가 어떤 식으로 바꾸면 좀 더 효과를 낼 수 있음을 안내하는 선제적 역할 또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쉽게 얘기하자면, "이거를 진행하려고 하는데 손익 좀 따져봐"의 탑다운(Top-Down) 지원에 더해, "이거를 바꾸면 좀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습니다"의 바텀업(Bottom-Up) 차원이랄까. 핀테크, IT회사, 유연한 경영방식을 지향하는 현재 기업 환경에서 이런 양자적 방식의 병행 진행은 어쩌면 필연적이기까지하다. 시대의 변화는 컨트롤 타워의 지시가 아닌 PO(Product Owner)와 PM들이 스스로 제품을 관리하며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즉 데이터는 이전의 제한적인 환경에서의 제한적인 역할과는 달리, 확장된 개념으로서 회사의 성장(Growth)을 견인하는 수단으로 작용해야 하며, 조직이 태동기-폭발기-안정기-쇠퇴기의 전 과정에서 성장곡선이 우상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노무 관리, 재무회계 관리, 영업 관리, 고객 관리 등의 수많은 경영학적 요소들과 더불어 데이터 관리는 다가오는 시대에 회사가 가져야 하는 필수 역량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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