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스승의 날이면 나의 학창 시절의 선생님보다 먼저 떠오르는 분이 계신다. 개구쟁이 아들 녀석의 초등학교 첫 담임 선생님이셨으니까 족히 30년 전의 일이다.
첫 수업 소개 시간.
처음에는, 얼굴 왼편에 동그란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서 귀여운 분이라고 생각했다가, 가늘고 선한 눈웃음이 햇살처럼 반짝거려서 내가 먼저 반해 버렸다. 선생님께서는 그때가 아마 40대 중반이 아니셨을까 싶다.
아담하고 다소곳하시면서 도회적인 느낌이 살짝 풍기시는 분이셨다. 그런데 이름은 뜻밖에 <갑돌이와 갑순이> 노래 주인공 이름과 같아서 세월이 꽤 오래 흘러도, 그 노래가 나오면 선생님이 떠올려지곤 했다.
아들 위로 두 누나가 있어도 학교 출입은 특별한 모임 아니고서는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러니 학교를 방문하는 일도 당연히 낯설었다. 당시에는 일을 하고 있긴 했지만, 외향적이지 못해서 학모들과도 가까이 지내는 일이 많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첫 수업 소개 시간에 개구쟁이 아들 덕분에 학급 학부모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교실 뒤편에는 아이들 수만큼 어머니들이 촘촘하게 겹쳐 서 있었다.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는데, 비좁은 틈으로 아들의 이름이 연속해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바람에 떠밀리듯 학급의 학부모 부회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으로 소소한 일들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극구 거부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개구쟁이 아들이, 같은 반 또래 아이들에 비해 성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호기심이 많고, 어린아이가 불안감을 안고 있는 듯한 행동이 자주 보였다. 특히 손이나 옷에 뭐가 묻기라도 하면 견디질 못하는 결벽 증세까지 보이기도 했다.
그런 아들을 학교에 맡기고 담임 선생님께만 아이를 전담시킨다는 것이,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끔이라도 아이의 학급 생활 정보를 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자, 익숙하지 않은 직함을 거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마음먹으니 홀가분했다.
입학 전에 미술 학원을 등록하고 3일 만에 수업 거부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땐 너무 기가 막혔다. 그것은 누구 탓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죄책감으로부터 오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겪는 불안감은, 엄마 뱃속에서 이미 겪어오던 것이 출생해서도 이어진 것 같아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사립유치원 다닐 때는 수녀 선생님의 지극한 배려와 관심으로 무리 없이 잘 마칠 수 있었다. 피아노 학원 역시 집중력이 뛰어나 남다른 실력을 보이며 빠른 진도를 보이기도 했다. 아들은 온순한 편이고 배려심이 많아서 친구들하고는 썩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문제는 호기심이 많아서 학교를 둘러본다든지, 뭔가 하지 않으면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평소에 옷이나 손에 더러운 것이 묻으면 참지 못했다. 아빠의 깔끔한 성격을 닮긴 했어도 정도가 지나쳤다. 바깥에서 놀 때도 흙이 묻기라도 하면 놀다가도 집으로 달려 들어왔다. 미술시간에 크레파스 칠하다 가도 손에 묻으면 참지 못하고 즉시 씻지 않으면 못 견뎌 했다. 그때마다 담임선생님은 수업 중이라도 아들의 손을 잡고 다독이며 화장실에 가서 씻고 오도록 배려해 주셨다.
아들이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의 호출로 첫 상담을 하게 되었다. 아들 녀석이 결벽 증세를 걱정하셨다. 또 미술 시간에 그림 그리다 말고 손에 묻은 크레파스 씻으러 간 녀석이 오지 않자, 친구를 보냈더니, 친구마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담임선생님은 수업 중이라도 아들의 손을 잡고 다독이며 화장실에 가서 씻고 오도록 배려해 주셨다.
넓은 교정을 제법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나는 그제야 기타 시설 위치를 조금 알게 되었다. 조금 후에 발견한 꼬맹이 두 녀석은 담벼락 아래 앉아서 개미들이 모여있는 모습에 푹 빠져있었다. 수업하다 말고 나왔을 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지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돌아 봤을 뿐이라고 했다.
아들은 해맑았지만, 내 가슴은 벽에 기대어 소리 없는 울음으로 펑펑 울고 있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보조개 핀 얼굴과 눈웃음으로 내 걱정을 덜어주셨다. 호기심 많은 아이라 그럴 수 있다고. 조금 더 크면 괜찮아질 거라며 위로의 말씀을 늘 잊지 않으셨다.
지금처럼 정보에 밝아서 전문적인 상담과 치료의 필요성을 느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오로지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면서 사랑과 칭찬으로 아이를 키웠다. 밖에서 더럽게 놀고 들어와도 깨끗하게 씻어주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냥 자기가 씻도록 했다. 고사리손으로 깨끗하게 씻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면 언제나 꼭 안아주면서 엉덩이 두드려주고 듬뿍 칭찬해 주었다.
나의 아들이 유별나게 결벽증세로 못 견뎌하고 호기심이 많아서 불안정하고 천방지축이던 아들이 그만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엄마 뱃속에 있으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공포심을 먼저 겪은 아이였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못 이겨 찾아간 병원에서, 엄마 뱃속에는 커다란 물혹이 꼬여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피가 고여있게 되면 반신 불수나 죽을 수도 있으니, 배를 열어봐야 안다는 것이다. 역시 아기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이 태아 4개월에 엄마의 혹시 술을 봐야 했다. 그리고 다시 6개월 후에 위험을 무릅쓰고 극적으로 그야말로 어렵게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런 이유로 나는 늘 아들에게 미안했다. 아픈 엄마로 인해 아들이 엄마의 고통까지 부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들이 언제나 내 편이다. 뒤돌아서는 아버지 편 들어줘도 은근히 기분 좋은 선물 같은 존재다.
태어나고, 그때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아이는 공포심인지 밤낮으로 울어댔고 먹는 것조차 순조롭지 못했다. 중학생이 돼서야 김치를 겨우 먹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체격이 또래보다 현저히 떨어졌다. 그러나 중학교 갈 때까지는 먹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많은 편이었다,
고학년에 올라갈수록 특별한 문제 없이 그래도 잘 자라 주었다. 부족한 것이 많아서 칭찬으로 키운 아이라서 그런지 정이 많고 배려심도 많은 아름다운 청년으로 평범하게 잘 자라주어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또 그런 날이 언제 있었냐 싶게 결벽 증세는 사라진지 오래다.
당시에는 학모들의 소위 치맛바람이 많이 불었었다. 아들의 담임선생님께는 치맛바람이 아니라 뭐라도 해드리고 싶었다. 미소가 예쁜 선생님께서는 소박하시기까지 했다. 뭐든 절대 사절이신 선생님은 극구 말리셨다. 어느 날은 무말랭이 김치를 정성껏 만들어 선물로 드리니 꼼짝없이 받으시고는 무척 좋아하시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5년 전 은행에서 우연히 마주친 선생님은 차분한 목소리와 다정한 모습은 그대로이셨다. 그러나 움직임은 연세를 비껴가지 못하신 것 같았다. 퇴직하고 연세가 높으신데 서울에서 손녀를 돌보고 계신다고 하셨다. 지금은 건강하게 잘 계시는지 궁금하다.
오늘 스승의 날을 맞아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휴대전화기에 저장 번호를 눌렀으나 본인에 의해 착신이 금지되었다는 음성만 차갑게 들린다. 이맘때면 동그란 보조개와 눈웃음이 예쁜 아들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그리워진다.
무말랭이 김치는 담임선생님 드릴 때 외에는 담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해마다 담아주시는 어머니표 무말랭이 김치를 주실 때는 어머니 정성을 두고 선생님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니 이게 맞나 싶다. 하지만 부족했던 엄마와 아이를 통한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가 문득 생각나게 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