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피아노 모음곡 #제 2곡

드뷔시 Suite Bergamasque L.75 - III. 달빛

by 철없는박영감

* 부제에 있는 음악과 같이 감상하시면 더 재밌습니다.


https://youtu.be/97_VJve7UVc?si=-PJ_D23T1-EjasJh


그 남자는 달이고 싶었다...


그 남자는 고달픔으로 늘 간신히 잠들다가 오랜만에 피곤함으로 평온하게 잠들었다. 괴로움으로 늘 한껏 움츠려 잠들다가 오랜만에 엄마품 속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들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잠든 표정이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었다. 가을의 새벽 공기는 찼지만, 조용히 밤하늘에 뜬 달은 그 남자의 방 창문으로 은은한 달빛 자장가를 덮어주고 있었다. 거울 속의 저 남자도 오랜만에 보는 그 남자의 평온한 모습에 안심하며 달빛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었다.


1986년 청년은 꿈에 그리던 대학교의 합격 통보를 받는다. 청년의 모교와 동네에는 청년과 합격한 대학교이름이 붙은 플래카드가 걸리고, 동네에는 잔치가 벌어진다. 친구들도 본인이 합격한 것 마냥 기뻐하며 청년을 목말에 태워 동네를 한 바퀴 돈다. 무엇보다 25년 동안 저렇게 기뻐하시는 부모님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첫 대학입학 학력고사에서 떨어진 후, 군대를 다녀오고, 재수를 시작해서 얻어낸 값진 결과이다. 한동안 청년의 방황으로 걱정했을 가족과 친구들, 특히 부모님의 마음고생을 청년은 잘 안다. 한 없이 어둠 속에 묻히던 시간들... 이제부터 청년은 부모님의 '희망 사다리'가 되어서 다시 한번 기뻐하시는 표정을 보리라 다짐한다.


그 남자는 중간에 포기하려고 했다. 360도 열려있던 가능성은 나이가 들 수록 각도를 좁혔다. 틈이 점점 좁아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자니, 점점 이 안에 속절없이 갇힐까 봐 조바심이 났다. 하루라도 빨리 저 틈사이를 빠져나가 세상과 마주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방법을 몰랐다. 방법을 모르니 답답했고 답답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남자는 길을 스스로 개척해 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응원해 주는 길만 따라온 그 남자였다. 가족이, 친구가, 학교가, 사회가 정해주는 길을 따라 그저 묵묵히 걸었을 뿐이다. 숨이 차고, 힘들어도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길의 끝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다.


자신의 방향을 정한 소년은 앞만 보고 달렸다. 정한 건지 정해진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짐을 싸서 길을 나설 뿐이었다. 자기만의 세계를 벗어난 소년은 부쩍 말 수가 줄고 어른스러워졌다. 집에서는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효자 아들로, 학교에서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 모범생으로, 친구들 사이에서는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는 든든한 벗으로, 소년은 이미 짜인 틀에 찍혀 나오는 붕어빵이 될 운명은 꿈에도 모르고 사회에서 올바른 방향이라고 정해 놓은 길을 따라 뒤돌아 보지 않고 달렸다.


그 남자는 가족을 찾아갈 면목이 없었다. 부모님은 이미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때 부모님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났던 동생들은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어느새 나이가 지긋해진 동생들은 원망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과 지원을 독차지했던 그 남자를 쉽게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그들도 이제는 누군가에게 사랑과 지원을 해줘야 하는 입장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는 부모님의 장례식을 끝내고 조용히 나와 산꼭대기에 있는 7제곱미터 그 남자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아련한 달빛만이 소리 죽여 우는 그 남자를 위로해 주었다. 그 남자는 달이고 싶었다. 조용히 밤하늘을 지키는 달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등불이 되는 고단함은 싫었다. 어른이 된 소년의 고단함에 유일하게 휴식처가 되어 주었던 음악실에서 들려오던 달빛 같던 그 피아노 소리. 그 남자는 꿈결에 그 피아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음악실에서 꿈같은 달빛 선율을 연주하던 그 소녀.


이제는 꿈에서나 다시 들을 수 있는 그녀의 「드뷔시 Suite Bergamasque L.75 - III. 달빛」...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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