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녹턴 No.2 in E-flat Major, Op.9-2
* 부제에 있는 음악과 같이 감상하시면 더 재밌습니다.
https://youtu.be/y1hMT3WcwGY?si=_h4XNpHU8LKb7Di4
그 남자는 갈 곳이 없었다...
그 남자는 놀랐었다. 분명한 것은 절대로 그 남자의 의지가 아니었다.
'누구의 의지였을까? 거울 속에 저 남자일까? 다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런 힘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솟아났을까? 대타라도 좋으니 한번 더 그럴만한 힘이 남아있을까?'
만감이 교차했었다. 비록 그 남자의 몸을 빌려 나왔을 뿐인 의지일지라도 잠깐이나마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었다. 커다란 폭발 후에 밀려오는 정적같이, 그 남자의 마음도, 하늘도 어느새 차분해져 있었다. 그 남자는 방으로 돌아왔었다. 방은 책상과 침대만으로도 가득 차있었다. 한쪽 벽에는 계절을 잃어버린 옷가지들과 냉난방기가 그 남자의 키만큼 쌓여있었다. 그 남자의 책상은 언제부턴가 책 대신 약봉지로 가득해졌었다. 침대도 언제부턴가 그 남자 대신 약봉지 주인 차지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서 보이는 창밖의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캄캄한 하늘에서 반짝이고 있는 저 별빛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쏘아진 빛일까?'
그 남자는 별을 따고 싶었었다. 그래서 별을 향해 손을 뻗었었다. 하지만 거칠고 쭈글쭈글해진 까만 손등에 가려질 뿐이었다.
2003년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의 시작이다.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한 청년의 공부방은 삼복더위와 청년의 체온으로 열기가 가득하다. 뒷꿈치를 힘껏 높여도 손 끝에 닿을락 말락 닿지 않는 별, 청년은 야속하기만 하다. 2~3년 안에 빨리 끝내겠다는 의욕이 앞서 초반에 무리한 탓인지 몸에 병이 생기고 만다. 도무지 책을 볼 수 없다. 소득도 없이, 병마와 싸우며 고시를 준비하는 동안 청년의 방은 점점 별과 가까워진다. 게다가 이제는 더 이상 청년이라고 할 수 없는 나이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꿈이 있는 한 청년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산꼭대기 공부방의 창문으로 더 밝고, 반짝이는 별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하지만 청년은 책상 위를 가득 채운 책들과 씨름하느라 바로 머리 위 별빛을 알아채지 못한다. 날이 밝아오며 별빛은 하나 둘 사라지고, 책상 위 스탠드 조명만 남아 청년의 머리 위를 밝힌다.
그 남자의 무대는 2017년 59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 사이 화병도 얻었다. 처음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고 했다. 고향에는 부모님도 계시고,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적응하지 못했다. 30년을 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공부만 해 온 그 남자에게 어울려서 살아야 하는 삶은 모순 덩어리였다. 미칠 것 같았다.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 남자는 점점 주변인들과의 교류를 피했다. 그리고 매일 밤 집을 나와 산을 올랐다. 깜깜한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그 남자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산꼭대기 공부방이 생각났다. 그곳에서는 진짜 행복한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은 피아노를 칠 때가 가장 행복했다. 작은 레슨실에서 피아노와 일대일로 마주하고 앉아 소년의 의지대로 울리는 소리로 가득한 세상을 느끼고 있노라면 온 세상이 손안에 있는 것 같았다. 건반은 소년의 세상이었다. 건반 위에서 소년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었다. 소년은 피아노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건반 위 자기만의 세상을 더 넓히고 싶었다. 학원에서 한두 시간 연주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어렵게 부모님께 집에 피아노를 놔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소년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 듣기를 더 바랬다. 피아노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창구일 뿐이지, 소년의 세상이 펼쳐지는 곳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설사 알았더라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정 형편도 그리 넉넉한 편은 못되었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했던 소년은 그 뒤로 바로 피아노 학원을 그만뒀다. 반항심이었는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효심이었는지는 소년도 알지 못했다. 다만 피아노 학원을 마지막으로 나설 때, 소년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 남자는 이제 60대가 되었다. 병을 얻고 가족과도 멀어지며 이 좁은 방을 벗어날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 남자는 산꼭대기 공부방으로 돌아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아파트경비, 공공근로, 공사판 막노동까지... 하지만 일하던 중 사고를 당하며 먹어야 하는 약이 점점 늘어났고, 행복할 줄 알았던 생활은 하루하루가 지옥이 되었다. 이제 그 남자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남자는 갈 곳이 없었다. 이제는 갈 데가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있는 것이다. 작은 레슨실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울리며 행복해하던 소년은 여전히 그 안에 남아 있었다. 마치 한 번도 레슨실을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 그 남자는 그것이 제일 편했다. 순수했던 소년의 세상이 되어 주었던 그때의 곡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쇼팽 녹턴 No.2 in E-flat Major, Op.9-2」의 선율이 맴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