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Op.8 "비창" 2악장
* 부제에 있는 음악과 같이 감상하시면 더 재밌습니다.
https://youtu.be/1mqCYYigZuo?si=RKMp_Qlhpq6qVPIj
그 남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정했었다...
햇살이 꽤 눈부신 아침이었다. 창문을 열면 선선한 가을 공기가 상쾌함을 더했다. 참새들도 기분 좋은 아침인지 유난히 즐겁게 울어댔다. '그래 이런 날이 좋겠어...' 그 남자는 바다같이 깊고 푸른 하늘을 보며 그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묘한 충동을 느꼈다. 파도가 일으킨 물거품은 구름이 되어 보고 있으면 철썩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남자의 7제곱미터의 삶 속에서 유일한 숨구멍은 침대에 누우면 보이는 저 작은 창문 밖 파랑이었다. 그대로 그 속으로 뛰어들면 시원할 것 같았다. 구질구질함에서 훨훨 날아 벗어날 것 같았다. 깔끔해지고 싶었다.
1996년 추운 겨울, 한 청년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얼마 안 되는 살림살이를 리어카에 싣고 동네에 들어선다. 청운의 꿈을 품은 청년은, 지금은 비록 땀을 흘리며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힘들게 리어카를 끌고 있지만, 한 2~3년 고생해서 고시만 패스하면, 남은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릴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청년의 표정은 가족과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묻어 있다. 밖에서는 '고시낭인', '고시폐인'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며 시끄럽지만, 청년은 자신에게는 해당 없는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
그 남자는 거울 속, 머리가 하얗게 센 저 남자가 영 낯설고 어색하고 싫었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 남자는 보고 있자니 화가 났다. 이대로는 못 견딜 것 같아서 멱살이라도 잡을 요량으로 오른손을 뻗으면, 저 남자는 왼손을 뻗어 못 만지게 했다. 문득 그 남자는 거울을 향해 뻗은 거칠고 쭈글쭈글해진 까만 손등을 발견했다. 거울 속 저 남자 때문에, 60년 넘게 사용한 손은 머리카락에서 빠진 멜라닌 색소에 염색된 듯 까맣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작물을 기를 수 없게 메말라 갈라져버린 땅처럼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거울 속 저 남자의 보이지 않는 손등은 예전에 그 남자가 갖고 있던 희고 촉촉한 손등을 갖고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이 길고 유난히 하얀 손을 가진 소년은 어릴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특히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따로 학원을 보내지도 않았는데도 늘 알아서 시험만 보면 100점을 받아왔다.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해주는 것이 소년의 부모는 늘 미안하면서도 동시에 말썽 한 번 부리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잘 해내는 어른스러운 소년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런 소년이 유일하게 부모님에게 졸라서 다닌 학원이 있었는데, 피아노 학원이었다.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 교정에서 노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 사이로 소년은 분명히 들었다. 뭔가 슬프면서도 차분하고, 쓸쓸하면서도 따뜻하고 포근한 소리였다. 소리를 따라 소년의 발길이 움직인 곳은 피아노 학원이었다.
그 남자는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 다리 위를 걷고 있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때 거기에 피아노가 있었을까. 그 남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었다. 실행에 옮길 용기가 날 때까지 발길 따라 걷던 중에 그 남자는 피아노를 발견했다. 아니 그 남자의 길목을 피아노가 가로막았다. 홀린 듯이 피아노 앞에 앉은 그 남자는 뚜껑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 건반이 어색하면서도 반가웠다. 건반을 살짝 눌러봤다. 조심스러운 울림이었지만 주위에 가득했던 소음들이 중화됐다. 그 남자의 귀로 들어간 건반 소리가 그 남자의 깊은 곳에 있던 그 무언가를 깨웠다. 갑자기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내면의 폭발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 남자는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억누르는 심정으로 그때 소년의 발길을 끌었던 피아노 학원에서 났던 소리를 떠올렸다. 슬프면서도 차분했고, 쓸쓸하면서도 따뜻하고 포근했던 그 소리를... 그 남자는 자기가 자기 같지 않았다. 마치 마리오네트가 된 것 같았다. 자신의 손에 줄이 달린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남자는 노을을 배경으로 다리 위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Op.8 "비창" - 2. Adagio Cantabile」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