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마음

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제13화)

by 철없는박영감

<지난 이야기 마지막>


은영은 석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점점 걱정이 되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굳이 장난을 친 그때 자신이 너무 싫었다. 상처를 준 건 아닌가, 어디 아픈 건 아닌가, 혹시! 사고를 당한 건 아닌가... 걱정의 강도가 점점 세져갔다. 오직 규칙적인 천장의 울림만이 그나마 그의 무사함을 알려 주고 있었다.


어느 날 은영은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를 위해 짐을 한 아름 안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13층에 있던 엘리베이터는 점점 속도가 붙어서 곧 3층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4층에서 '땡'하고 멈춰 섰다. 은영은 혹시 우연히 석원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리고 숫자가 3이 되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은영은 들고 있던 짐을 전부 놓치고 몸이 얼어버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지난번 자신을 쫓아오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빗나간 마음


은영은 입을 틀어막아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참았다. 그 남자도 3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리 없다고 생각했는지... 꽤 당황한 듯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버린 은영을 내버려 두고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다. 은영은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흩어진 재활용 쓰레기들을 수습해야 했다. 은영은 생각했다. 분명히 그 남자가 맞았다. 지난번처럼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지만 은영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체취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주고 있었다.


은영은 얼른 집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상황실에 전화를 했다. 하지만 역시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의심만으로는 CCTV를 확인할 수 없었고... 현재 수상한 사람에 대한 다른 신고도 없다고 했다. 은영은 이번엔 진짜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112'에 신고를 하려고 스마트폰 잠금화면을 풀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에는 그 남자가 서 있었다.


'흐윽' 은영은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떡하지... 집까지 찾아왔는데...' 은영은 손이 떨려 스마트폰을 놓칠뻔했다. '경찰... 112... 112...' 은영이 정신없이 스마트폰 잠금화면을 풀려고 하는데, 그날따라 '안전안내문자'가 연속으로 울려서 잠금화면 풀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잠시 후, 인터폰 화면으로 그 남자와 석원의 모습이 같이 보였다. '어?' 은영은 호기심이 생겨 조심스럽게 인터폰 통화버튼을 눌렀다.


"... 네?"


"어! 누나! 나예요... 석원이..."


인터폰 너머로 석원의 달콤한 목소리가 다급히 울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은영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우선 그 남자가 왜 4층에서 내려왔는지...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는지... 그리고 그동안 신기루 같던 석원이 왜 지금 은영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지... 특히 석원은 왜 그 남자와 같이 있는지... 모든 것이 이치에 닿질 않았다.


"... 어... 어... 석원아... 무슨 일이야?"


은영은 스마트폰의 긴급통화 화면을 확인하면서 인터폰에 대답했다.


"어! 저기 누나! 여기 내 친구가! 그러니까 상제, 얘가 2층 사는 앤 데... 어... 누나 문 좀 열고 말하면 안 될까? 복도에서 너무 시끄럽게 하는 것 같은데..."


은영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어...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있어서 문 열기가 좀 그런데... 급한 일이니?"


"아... 그럼 누나! 내가 밖에서 전화할게... 전화... 그러면 되겠다... 전화... 그렇지? 누나 내가 밖에서 전화할게..."


문 밖이 조금 소란스러운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은영의 스마트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누나! 많이 놀랐지? 자세한 사정은 만나서 얘기해 줄게. 여기 집 앞 카페에서 기다릴게...』


은영은 일단 냉수를 한 컵 들이키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친구? 2층? 사정?' 은영은 아무리 이리저리 대봐도 퍼즐이 맞춰지지 않았다. '그 남자가 2층에 산다... 우리 아랫집이다... 그럼 지난번에 쫓아온 게 날 따라온 게 아니고 자기 집에 가는 길이었다...' 여기까지는 퍼즐이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갔다. 그런데 마지막 몇 조각 '왜 4층에서 내려와? 왜 둘이 같이 있어..?!' 이 부분이 도저히 맞춰지지 않았다. 영 다른 모양의 퍼즐조각 같았다. 일단 둘은 카페에 있는다고 했다. 은영은 생각을 조금 더 하고 문자를 보냈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줘. 나가려면 준비가 좀 필요해』


은영은 카페는 사람도 많고, 대로변이니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석원이 걱정도 됐고, 궁금하기도 했다. 은영이 카페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약 한 시간 정도 뒤였다.


"어! 누나! 여기! 여기!"


석원이 자리에 반쯤 일어서면서 은영을 보고 손을 들어 위치를 표시했다. 그 남자 역시 같이 일어서려다 석원이 금방 앉자 따라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얼굴에는 불만 가득한 굳은 표정밖에 없었다.


"누나! 앉아... 뭐 마실래?"


둘이 나란히 앉은 테이블로 은영이 주저주저하며 다가오자 석원은 평소와는 다르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을 했다. 은영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지만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은영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겠다고 하자 석원이 바로 일어서려고 했다.


"아니에요. 형! 앉아있어요. 제가 갔다 올게요.!"


그때 그 남자가 석원의 팔을 붙들어 앉히며 대신 일어섰다. 그 남자가 음료를 주문하러 키오스크 쪽으로 사라지자 숨 막힐 듯한 공기가 드디어 조금 누그러졌다. 은영은 얼른 고개를 들어 석원을 살폈다. 어디 협박을 당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약점 잡힌 데가 있는지 눈으로 석원에게 묻고 있었다. 석원은 은영의 눈빛을 느끼면서도 짐짓 딴청을 부리 듯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은영은 답답한 마음이 커져서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로 석원에게 물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어...! 어...! 저기 쟤 오면 얘기해 줄게...!"


의심의 화살은 점점 석원 쪽을 겨냥하게 되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표현이 필요한 상황인가... 은영은 석원의 작은 표정변화, 몸짓, 눈빛의 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둘이서 한패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안 놀랄 각오도 했다. 다만 무슨 목적인지... 이제는 그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주문을 마친 그 남자가 번호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은영은 다시 경계태세를 높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 누나! 먼저 소개할게... 여기는 여상제라고... 누나네 아랫집 204호에 사는 애고..."


'그건 알겠거든... 근데 왜 둘이 같이 있는지 빨리 말하라고...' 은영은 지금 드는 이 생각을 큰 소리로 묻고 싶었지만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섣부르게 자극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상제야! 여기 이 분은 성함이 이은영 씨이고... 너네 윗 집 304호에 사셔... 인사드려..."


'이 분? 이은영 씨? 쟤가 지금 뭐래?'라는 표정으로 은영은 석원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모자를 눌러썼던 상제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키도, 덩치도 석원보다 다 커 보였고... 밝은 금발로 염색한 머리에 나이는 많이 먹었다 해도 스물다섯여섯 정도밖에 안돼 보였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그래! 딱 은영의 옛날 집으로 이사 온 신혼부부의 신랑느낌이었다.


모자를 벗겨 놓고 보니 그렇게 수상하고 위협적이던 분위기가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덩치가 크고 모자를 눌러써서 그렇지 인상만으로는 막 젖을 뗀 아기 같았다. 은영은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해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석원은 어떻게든 뭔가를 풀어보려고 애쓰고 있는 듯했지만 도대체 뭘 풀고 있는 건지 은영은 알 수 없었다.


"저... 그러니까... 누나... 여기 상제는 누나 아랫집에 살고... 아 이건 말했지... 그러니까... 아! 서른 살이고 지금은 프리랜서를 하고 있어... 그래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고... 그래서 아마 거의 집에 있어... 그리고..."


석원의 주절거리는 말보다, 아랫집에 산다는 여상제의 정체보다, 은영은 '아마 거의 집에 있어...'라는 말이 그녀의 뒤통수를 때리는 듯했다. 낮에 비는 집인 줄 알았던 정보가 틀렸다는 사실도 그랬고... 그걸 석원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도 그랬다. 잠시 후 음료가 나왔다는 소리에 다시 한번 상제가 일어났다. 은영은 이때다 싶었다.


"야... 다 필요 없고... 어떻게 둘이 같이 있어? 너 사기꾼이야? 아니면 둘이 짜고 나한테 뭐 뜯어내려고 그랬니?"


"아니야... 아니야... 누나 그런 거 아니야... 나 그런 사람 아니야?"


"그럼 뭐야? 나 갖고 논거야? 혼자 산다고 무시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둘이 사귀기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어? 어...? 어...! 어...... 어떻게 알았..."


"에? 에...? 에......!"


석원과 은영사이에 서로 다른 의미로 놀란 반응이 엇갈렸다. 석원은 들켰다는 의미의 반응이었고, 은영은 귀를 의심한다는 의미의 반응이었다.


"맞아... 우리... 그... 그... 그런 사이야...!"


"에...?!"


은영은 놀라 자빠지겠다는 표현은 딱 이럴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있었다.


왜 안 되는데


"안돼!"


은영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카페 안 사람들의 이목이 쏠림을 느끼고 잠잠해질 때까지 은영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부담된다거나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은영의 머릿속에는 사방에서 범종이 울리는 듯했다. 시공간이 일그러졌고, 유체이탈을 경험하는 듯했다. 그런 은영 앞에 석원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상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저... 누나... 은영누나...?"


은영은 석원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느껴지는 마법이 풀리는 순간을 맞이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상제의 표정을 봤을 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비비디바비디 부, 아브라카다브라'같은 온갖 주문들이 드디어 잠잠해졌다. 은영은 곧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여기서 자신이 패닉에 빠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패닉에 빠져서도 안 됐다.


"거 봐요... 형... 내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이런 거 그냥 받아일 수 있는 사람 절대 없어요... 부모도 연 끊고 돌아서는 마당에...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 어떻게 받아들여요... 내가 많이 겪어봐서 아는데... 이제 형이나 나나 곧 이 동네 떠야 돼요... 곧 소문이 쫙 퍼지겠죠... 처음에는 세균 보듯이 사람들이 피할 거예요... 그러다가 혐오하는 눈빛과 손가락질이 시작될 거고... 그리고 점점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하겠죠... 결국 누군가 영웅심에 발 벗고 나서서 큰소리 내기 시작하면... 욕하고 공격하고... 마녀사냥 당하는 거예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형은 현실을 너무 동화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고요..."


은영의 상태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살피고 있는 석원을 겨냥해서 상제가 쏘아붙인 말들은 이상하게 은영의 가슴에 와서 콱콱 박혔다. 반박할 수 없었고, 상제의 말대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안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슴에서 박혔던 가시가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뭔가 시원하게 사라지는 느낌에 개운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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