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제14화)
<지난 이야기 마지막>
"안돼!"
은영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카페 안 사람들의 이목이 쏠림을 느끼고 잠잠해질 때까지 은영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부담된다거나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은영의 머릿속에는 사방에서 범종이 울리는 듯했다. 시공간이 일그러졌고, 유체이탈을 경험하는 듯했다. 그런 은영 앞에 석원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상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저... 누나... 은영누나...?"
은영은 석원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느껴지는 마법이 풀리는 순간을 맞이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상제의 표정을 봤을 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비비디바비디 부, 아브라카다브라'같은 온갖 주문들이 드디어 잠잠해졌다. 은영은 곧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여기서 자신이 패닉에 빠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패닉에 빠져서도 안 됐다.
"거 봐요... 형... 내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이런 거 그냥 받아일 수 있는 사람 절대 없어요... 부모도 연 끊고 돌아서는 마당에...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 어떻게 받아들여요... 내가 많이 겪어봐서 아는데... 이제 형이나 나나 곧 이 동네 떠야 돼요... 곧 소문이 쫙 퍼지겠죠... 처음에는 세균 보듯이 사람들이 피할 거예요... 그러다가 혐오하는 눈빛과 손가락질이 시작될 거고... 그리고 점점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하겠죠... 결국 누군가 영웅심에 발 벗고 나서서 큰소리 내기 시작하면... 욕하고 공격하고... 마녀사냥 당하는 거예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형은 현실을 너무 동화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고요..."
은영의 상태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살피고 있는 석원을 겨냥해서 상제가 쏘아붙인 말들은 이상하게 은영의 가슴에 와서 콱콱 박혔다. 반박할 수 없었고, 상제의 말대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안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슴에서 박혔던 가시가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뭔가 시원하게 사라지는 느낌에 개운해졌다.
왜 안 되는데
석원이 얼음물을 가지고 와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은영 옆자리에 앉았다.
"상제야... 넌 가만히 있어..."
"......"
석원의 말에 상제가 입을 다물었다. 석원은 은영의 어깨를 부축해서 푹 숙인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얼음물을 건넸다.
"상제야... 누나 그런 사람 아니야... 나는 믿어..."
석원은 은영을 살피며 상제에게 말했다. 은영은 얼음물을 마시니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석원의 '믿고 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것일 수도 있었다. 엄마도 그렇고, 석원도 그렇고... 도대체 뭘 믿는다는 건지... 은영은 차분히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안해... 석원아... 미안해요... 여... 상제 씨라고 했던가요? 아무튼 미안해요... 나도 너무 급작스러워서... 석원아... 이제 괜찮아 됐어... 너 상제 씨 옆으로 가서 앉아... 나 진정됐어..."
은영은 애써 안정을 찾은 듯 연기를 해야 했다.
"그러니까... 지금 두 사람......"
석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선택한 사람이잖니...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지... 너희 둘이 중요한 거지... 다른 사람을 왜 신경 써... 너희는 너희들의 인생을 살아...' 책에서 읽었던 이 상황에서 해야 할 온갖 축복의 말들이 실제상황에서는 은영의 넘기고, 미루던 습관이 도진 듯 성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진짜 남이었다면... 타인이었다면... 아니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은영은 자신과 석원의 관계가 남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의 친누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눈물이 났다. 기쁨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도 아니었다. 아니 반대로 기쁘면서 동시에 슬퍼서 눈물이 났다.
'그동안 석원이와 좀처럼 좁혀지지 않던 알 수 없는 거리감의 정체가 이거였구나...'
입으로 미소를 띠면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울었는지... 입술은 떨리는데 눈으로 웃으면서 눈물을 흘렸는지... 은영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온갖 감정이 뒤섞여 은영 안에서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은영은 자신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며,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인류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 대상은 환경, 기후, 쓰레기 같은 무기물에만 한정된다는 사실을 지금 처음 깨닫고 있었다.
'뭐야... 나 뭐야... 나 이 정도밖에 안돼...? 지금까지 뭐 한 거니 은영아? 항상 너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잖아... 그리고 약자로만 남지 않겠다고 약자의 편에 서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거 아니었어? 약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그래 너 하나는 강자가 될 수 없지... 하지만 다수에 붙어서 강한 척하고 있잖아... 그리고 지금 소수인 두 사람이 약자가 되어 앞에 앉아 있잖아... 은영아 뭐 하니...? 야 너 뭐 하고 있는 거니? 왜 안돼? 왜 안 되는데?'
은영의 마음속 상반된 감정의 세력싸움에서 승자는 누구였을까? 그때 카페 안 모든 사람의 스마트폰이 동시에 '띠리릭' 울렸다.
『[서울경찰청] OO구에서 배회중인 이은영 씨 (여, 74세)를 찾습니다. 164cm, 50kg, 녹색상의, 핑크색하의, 흰신발 vo.la/OOOOO/☎182』
은영은 지금 자신과 이름이 같은 누군가가 자신과 똑같은 인상착의로 어딘가를 배회 중이라는 안전안내문자를 보자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동안 스팸처럼 보아 넘겼던 안전안내문자와 재난문자들... 은영은 마음을 확실히 정했다. 그리고 가슴에서 박혔던 가시가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뭔가 시원하게 사라지는 느낌에 개운해졌다.
은영은 손님맞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로봇 청소기를 꺼내서 바닥청소를 맡기고, 식기세척기에서 그릇들을 꺼내 정리했다. 빨래를 개어 넣고, 화장실 청소까지 했다. 오랜만에 대청소로 기분이 좋아졌다. 집 보러 오기로 한 손님들과 약속을 지키려면 좀 더 서둘러야 했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리고 인터폰 화면을 확인한 은영은 활짝 웃으며 현관으로 나갔다.
"우와... 같은 아파트인데, 집이 훨씬 좋아 보이네요..."
"이거... 별 것 아니긴 하지만... 집들이 선물... 누나!"
명절이 되어 남동생네 식구가 은영의 집을 찾아왔다. 같은 아파트 단지이고 이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집이 깨끗하다는 이유를 표면상 내세웠지만, 사실 엄마가 집 청소하기 귀찮아서 은영에게 손님맞이를 떠넘긴 것이다. 은영도 집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다. 그러자고 동의했다. 그래서 동생네가 처음 은영의 집에 방문했다.
"우진이... 고모한테 '안녕하세요' 했어?"
"......"
"고모한테 얼른 '안녕하세요' 해야지?"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현관문에 반쯤 걸쳐 서서 장난감 먼저 사러 가자고 떼를 쓰고 있는 조카에게 동생 부부는 가정교육을 하고 있었다.
"장난감은 언제 사러 가?"
"엄마가 보니까... 이렇게 인사도 안 하고, 착한 어린이도 아닌데... 누가 장난감을 사줘?"
"........ 안녕ㅎ...."
못 본 동안 키가 몇 뼘쯤은 자란 것 같은 조카가 장난감 타령을 하며 쭈볏쭈볏 마지못해 은영에게 인사를 하고 올케 뒤로 숨었다.
"어서 와! 우진이... 고모 안 보고 싶었어?"
"할머니, 할아버지는...?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간다고 했잖아... 여기는 3층인데... 할아버지 집은 10층인데..."
"응! 여기는 고모 집이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지금 오시는 길이야... 어때 고모집 좋아? 오늘은 고모네 집에 다 모이기로 했어... 금방 오실 거야... 우진이 신발 벗고 고모 집에 들어와서 같이 기다릴까?"
"응. 그리고... 어... 그럼... 장난감 이따 할아버지, 할머니 오면 사러 갈 거야?"
"우진이 뭐 갖고 싶은데...? 요즘음 또봇이니? 미니특공대니?"
은영은 조카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과 함께 한없이 아량이 넓은 어른 코스프레 중이었다. 인생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가면이 남아있는 건지 은영은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누나 말도 마... 요즘은 파워레인저야... 드디어 등골브레이커의 길에 접어든 것 같아..."
"아! 그래? 또 바뀌었어? 진짜 애들 관심사는 금방 금방 바뀌는구나... 운전하느라 피곤하지? 차는 안 막혔어?"
"어! 생각보다... 이 쪽으로 오는 건 별로 안 막히고 가는 게 엄청나더라... 나중에 집에 갈 때가 문제겠어..."
"그렇지 명절에는 다들 한 방향으로 움직이니까..."
올케가 겨우 설득하는 데 성공했는지 신발을 벗고 들어선 조카는 할아버지집과 비슷한 구조인데 완전히 새로운 환경인 고모집에 매료되어 여기저기 집안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아이는 점점 신이 나서 숨을 헥헥거리면서도 흥분해서 똥강아지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남동생 부부는 거의 무조건 반사처럼 '뛰면 안 돼!'라는 주문을 시전 했다. 은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진아... 괜찮아... 그냥 뛰어도 돼! 우리가 시끄럽게 해야... 아랫집 상전이 서둘러 올라온다... 우진이... 신나게 뛰어... 집에서 못 뛴 거... 여기서 다 뛰고 가!"
잠시 후, 인터폰이 울렸다. 은영은 인터폰으로 다가가 화면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흐흐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양반은 못되겠다... 어서 와!"
"어! 무슨 말? 뭐야 설마 욕한 건 아니지? 어! 우진이도 와 있었네! 안녕 우진아..."
제 고모한테는 데면데면하던 조카 녀석이 방금 들어온 석원에게는 세상 반가워하며 두 팔을 벌려 품에 달려들었다. '하긴 이 정도 키에, 이런 외모면... 나도 한 때 저 품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라는 생각에 은영은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우리 우진이 얼마나 컸는지 한번 안아볼까... 으랏차차! 오우 이제 우진이 많이 컸는데... 이제 들어 올리려면 각오가 필요할 정도인데... 어! 처남도 왔어? 처남댁도 오셨어요?"
석원이 은영의 동생 부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형님 오셨어요? 오랜만이에요... 어째 나만 늙나 봐... 어떻게 그렇게 안 늙어요? 질투 나게..."
동생도 오랜만에 보는 석원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들어온 그대로 돌아 나가고 싶냐! 야 너 같은 남편 필요 없거든... 이게 죽을라고...! 지금 나한테 세컨드 하라는 거야 뭐야...? 얻다 대고 처남이래? 상제야 얘가 내 동생한테 처남이란다... 니 남편 단속 좀 해라..."
"누나 안녕하세요... 우와 집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하네요... 오! 우진이도 안녕...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상제가 뒤이어 따라 들어오며 가족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쨌든... 어서 와라! 나의 호위무사들... 자... 이제 남자들... 전 부칠 준비하시고... 올케는 애들 케어나 해! 과일하고 음료수하고 떡 하고 여기 꺼내 놨으니까 알아서 챙겨서 드시고... 남자들...! 뭐 해!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아니 아랫집 상전을 이렇게 막 부려먹어도 되는 거야? 손님을 부려먹는 건 어느 나라 법이야? 이건 어디에 신고해야 되는 거야? 이러면 앞으로 고달파지실 건데..."
석원은 말과는 다르게 제일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며 너스레를 떨었다. 세뱃돈 줄 어른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생각에 더욱 신이 난 건지 제자리에서 신나게 방방 뛰는 조카를 바라보며 은영은 역시 명절에는 식구가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영은 이 동네가 점점 더 좋아졌다. 지금 짓는 행복한 표정을 본인이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지금 은영의 표정은 진짜 자기 얼굴임에 틀림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