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제12화)
<지난 이야기 마지막>
영문을 모르는 라이더는 자신의 할 일을 마치자 바로 퇴장했다. 그리고 석원은 자기가 한 잘못이 아니지만 앞 집 아주머니께 연거푸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은영은 얼른 배달앱을 확인했다. 배송메모를 다시 보니 분명히 '앞 집에 놔주세요'라고 쓰여있었다. '헉!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히 집 앞에 놔주세요라고 썼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언제부터 이런 거지'
그동안 은영이 집으로 배달시킨 모든 메모에 전부 '앞 집에 놔주세요'라고 적혀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 지난번 세영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저... 공동현관에서 304호 왔다면서 문 열어달라는 인터폰이 이상하게 자꾸 저희 집으로 오는데요... 왜 그럴까요?"
은영은 아차 싶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인터폰 시스템 오류가 아니었구나... 아... 앞 집에 내가 완전 상전, 빌런, 꼴통 짓을 다하고 있었구나... 헉!'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택배들은 배송메모 같은 거 상관없이 주문자 동호수만 보고 휙 던져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배달앱에서는 우리 일 잘하시는 사장님들이 배송메모를 꼼꼼히 체크하시고 일부러 '303호 배달', '403호 배달'... 이렇게 손수 수기로 적어서 배송을 보냈던 거라는 것을 영수증을 보고 나서야 알아챘다. 은영이 주방에 숨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있는 동안 석원은 앞 집 아주머니를 겨우 달래서 보내고 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왔다.
"미안해... 난 분명히 '집 앞'이라고 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앞 집'으로 잘못 썼더라고..."
"아휴~ 잠탱이 씨... 잠이 많이 모자라셨나 보네요..."
"아... 그러니까 '집 앞'을 '앞 집'으로 잘못 써놓고 여태껏 보고 싶은 대로 본 거라니까..."
"알았어... 그럴 수도 있지 머... 됐어..."
은영은 당장 내일 마트에 가서 세영에게 사과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말하기도 좀 그렇지마는
"그렇죠? 그렇게 된 거죠?"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세영은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얼마나 똑똑한데 그런 실수를 해...'라고 눈으로 말하는 듯했다. 이전에 어머님의 강제침입 미수 사건만 아니었다면 어젯밤 석원의 앞 집 아주머니처럼 노발대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네... 말하기도 좀 그렇지마는... 제가 배송메모를 잘못 쓰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요... 정말 죄송해요... 제대로 확인했어야 하는데..."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죠...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앞으로 저희 집으로 배달 오면 제가 먹어도 되는 거죠?"
세영은 일부러 은영의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듯했다.
"아 그럼요! 다음에 또 그러면 그냥 드세요... 제가 선물로 드릴게요..."
"아... 다음에는 어디서 배달 올 지 기대되는데요... 비싼 거로 시켜주세요... 하하하"
은영은 그나마 친해졌기 망정이지 서로 대면대면한 사이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만으로 등에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아! 오신 김에 저기 사과... 우리가 팔려고 포장하고 남은 건데... 좀 상처는 났지만 맛은 좋아요... 괜찮으시면 가져다 드세요. 그냥 드릴게요."
"네? 아니 뭐 이런 걸 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서비스도 너무 많이 주셔서 밑지고 파시는 거 아닌가 걱정돼요..."
"에이~ 이웃사촌 좋다는 게 뭐예요... 어차피 저것들은 상품성이 없어서 팔지도 못해요... 빨리 먹으면 아무 지장 없는 것들이에요... 잘 골라서 가져가세요..."
"아~ 감사합니다. 잘못한 것도 있는데 이렇게 받기만 해서 더 죄송하네요... 그럼 다음에 저녁 대접이라도 할게요."
"아! 좋죠... 다음에 꼭 같이 식사해요. 저도 은영 씨랑 대화하면 재밌거든요..."
"네~ 그럼 수고하세요."
은영은 사과를 한 바구니 담아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번호키가 또 평소와 다른 알람소리를 냈다. '건전지가 또 나갔네... 별로 나다니지도 않았는데, 무슨 교체시기가 이렇게 빨리 돌아와... 건전지를 싼 거로 사서 그런가...' 은영은 역시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비싼 메이커 건전지로 사다가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와 요즘 사과 비싸던데... 너무 잘 됐다... 어! 근데 나랑 오사장님… 이렇게 되면 서로 사과를 주고받은 게 되나? 흐흐흐' 은영은 속으로 아재 개그까지 치며 신이 나서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공짜 사과를 자랑했다.
"야~! 그런 게 있으면 우리 것도 받아와야지... 어차피 못 파는 거라면서... 요즘 과일이 얼마나 비싼데..."
"내가 많이 가져다 놨으니까 가지러 오세요... 달라는 대로 드릴게요..."
"어! 거기 가도 돼?"
"에? 무슨 말이에요? 가도 되냐니... 딸네집에 오는데 뭐가 어때서...?"
"아니... 그게 아니고... 에라 모르겠다... 너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나 본데... 어떤 놈이야?"
"엥? '어떤 놈이냐'니...? 진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야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반찬 갖다 나르지 말라고 잔소리하던 애가 언제부턴가 도로 가져오지도 않지... 몸 아프다고 쥐똥만큼 먹는 애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반찬 떨어졌다고 하지... 누굴 속이려고 그래... 어떤 놈이야?"
은영은 말 그대로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얼굴이 새빨개진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아마 지금이 인생에서 제일 빨간 날이었을 것이다.
"어머! 어머! 어머! 엄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남자라니! 남자라니...!"
"얘... 너 거짓말 진짜 못하는 거 너만 모르지? 거짓말하는 거 다 티나~ 야! 왜... 어떤 놈인데... 아직 엄마한테 말 못 해주니? 아부지한테는 비밀로 할게... 나만 먼저 좀 알자... 나 궁금한 거 못 참는 거 너도 알잖아...!"
은영은 자신의 호기심 가득한 성격이 누구한테서 온건 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이~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 그냥 우리 윗 집에... 거기 숙소라고 했잖아요... 거기 이사떡 돌릴 때 인사했던 사람이 지난번에 치한이 따라오는 거 도와준 적도 있고 해서 고마워서 보답할 건 없고, 남자들만 있다고 해서 반찬 좀 갖다 준거지... 특별한 거 아니에요..."
은영은 임기응변으로 둘러댄 말이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그럴듯하게 잘 둘러댄 것 같았다. 아직 이 정도 임기응변 실력이 살아있는 것 보니 다시 구직을 하며 면접을 봐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에이 뭐야... 그런 거야? 난 또 좋은 소식 있을까 싶어서 더 신경 써서 만들었는데... 김새네... 알았어... 은영아~!"
"나 믿는다고?"
은영은 엄마가 무슨 말할 줄 다 안다는 식으로 말을 끊었다.
"알면 잘해. 이것아... 근데 윗 집에 걔 괜찮으면 그냥…"
"엄마! 그만 끊어요."
은영은 엄마의 말을 자르고 전화를 끊으며 집에서 반찬 나르는 짓에 좀 더 신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석원의 생일날 둘이 나눈 속 깊은 대화는 단순 아는 누나, 동생사이는 뛰어넘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지마는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도 아닌 것 같고, 뭐가 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 뒤로 은영이 윗 집으로 올라는 가는 일은 전혀 없었고, 금방 예전과 똑같이 석원이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마주치거나,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면서 손을 흔드는 정도가 전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도 은영은 환기 때문에 문을 열고 있는데, 역시나 석원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이번에는 은영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석원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멍 때리고 있나 싶을 정도로 은영이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못 볼 정도로 넋을 놓고 있었다. 은영은 주변을 살펴도 다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장난기가 발동했다.
"야~ 꽁생원!"
벤치의 석원이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석원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얼굴이 새 빨개져서는 엄청 당황해하며 얼른 그 자리를 떴다. 은영은 혹시나 주변에 사람이 있었나, 자기가 실수한 건가 싶어 창밖으로 살폈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뭐야~ 왜 저래? 별명 부르는 게 그렇게 싫었나? 내가 장난이 좀 심했나?"
은영은 나중에 석원과 괜히 어색하게 마주치는 것이 걱정되었지만 뭐 자주 보니까 그때 제대로 사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뒤로 한동안 석원의 모습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빗나간 마음
은영은 석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점점 걱정이 되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굳이 장난을 친 그때 자신이 너무 싫었다. 상처를 준 건 아닌가, 어디 아픈 건 아닌가, 혹시! 사고를 당한 건 아닌가... 걱정의 강도가 점점 세져갔다. 오직 규칙적인 천장의 울림만이 그나마 그의 무사함을 알려 주고 있었다.
어느 날 은영은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를 위해 짐을 한 아름 안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13층에 있던 엘리베이터는 점점 속도가 붙어서 곧 3층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4층에서 '땡'하고 멈춰 섰다. 은영은 혹시 우연히 석원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리고 숫자가 3이 되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은영은 들고 있던 짐을 전부 놓치고 몸이 얼어버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지난번 자신을 쫓아오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