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제11화)
<지난 이야기 마지막>
은영은 혼자만의 씁쓸함은 묻어두고 석원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나는 누나처럼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라서... 누나처럼 재밌지 않을지도 몰라..."
"그런 건 걱정 마시고... 시작이나 하시죠... 꽁생원 씨!"
"아~ 진짜 별명 괜히 가르쳐줬어... 내 친구였으면 그 별명 부르는 순간 최소 전치 4주였어... 누나니까 봐주는 거야... 경고야!"
"알았어... 알았어... 또 말 돌리지 말고... 자 이제 진짜로 니 얘기 좀 해봐...!"
"난 그냥 조용한 애였어... 특별히 잘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했고..."
"에이... 그게 뭐야... 사춘기 때 안 그런 사람이 어딨어... NG! NG! 다시 시작해..."
"아... 이거 안 먹히네... 진짜 누나한테는 못 당하겠다! 역시 작가는 다르구나... "
"자 너의 진짜 얘기를 들려주세요... 공석원 씨!"
은영이 젓가락 마이크를 석원의 입에 갖다 대며 눈을 반짝였다.
내 이름은 '공석원'
은영의 재촉에 석원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은영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나 진짜 술 안 취한 거지? 내 얘기 끝까지 들을 자신 있는 거지?"
석원은 손바닥을 은영의 눈앞에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은영은 석원의 손을 치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장난기 가득했던 눈빛을 거뒀다. 석원은 조용히 자기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누나가... 음... 내가 결혼 안 하고 있는데 부모님이 가만있냐고 물었었지? 사실... 나 부모님과 의절한 듯 지낸 지 꽤 됐어... 처음에는 그저 당신 같은 사람들 기쁘게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복수심 같은 거였어... 당신 같은 사람들은... 자식을 낳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왜 낳아서 날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드냐... 손주 같은 것은 더더욱 바라지도 마라... 볼 자격이 없다... 그렇게 생각했었어... 사춘기에 싹트기 시작한 생각이 '빵' 터진 거지... 사춘기 때는 뭐든지 원망스럽잖아..."
"......"
"부모님은 단 둘이 고향을 떠나 상경해서 서로 의지하면서 타향살이를 시작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들이었어... 지금도 '쌀'을 '살'이라고 한다...? 흐흐흐... 그렇게 의지할 데라고는 서로 밖에 없었는데... 아버지가 바람이 났나 봐... 나중엔 어머니한테 그 여자까지 같이 셋이 살면 안 되겠냐고 했다더라고... 뭐 그 뒤는 상상하는 것처럼 막장이었나 봐... 너 죽고 나 죽자... 날마다 부부싸움을 해대는 통에 시끄럽다고 주인집에서 보증금을 내주면서 나가달라고 까지 했다더라... 그때가 아마 내가 두 살이고... 동생이 뱃속에 있었을 때였을 거야..."
"헉! 두 살 때를 기억해?"
"당연히 기억 못 하지... 그런데 신기하게 한 장면은 뚜렷하게 기억나... 단칸 셋방에 나는 구석에서 울고 있고, 아버지가 어머니 멱살을 잡고 막 때리던 장면... 엄마도 물러서지 않고 악을 쓰면서 덤비던 그 장면이 눈을 감고 생각하면 떠올라... 전쟁이 난 것 같은 현실과는 다르게 밝은 가을 햇살이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밖은 선선하고 공기도 깨끗했는데 우리 집만 두 사람의 난투극에 가까운 몸싸움 때문에 먼지가 풀풀 날려서 햇살에 비치고 있었지... 가구는 배치가 어땠고... 사슴이 그려져 있는 내 애착 담요가 어디에 깔려 있었고... 다락방으로 통하는 나무문이 벽에 어디에 있었고... 누리끼리한 벽지가 발라져 있었던 그 방, 그날, 그 장면이 아직 생생해.."
"......"
"그 뒤로 어떻게 어떻게 그 여자와의 관계가 정리된 것 같아... 그리고 어머니가 술을 드시기 시작했지... 그리고 술에 취하면 항상 나를 불러 세워놓고... 내가 이 수모를 겪고도 너 때문에 이혼도 못하고 저런 인간이랑 산다면서 신세한탄을 했어... 그러면 아버지는 그냥 못 들은 척 자신이 마주해야 할 잘못의 대가를 슬쩍 나한테 떠넘기고는 무관심으로 일관했지...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내 자식은 이런 지옥 같은 세상에 못 나오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그런데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지금 어머니 스마트폰에는 아버지 사진만 한가득이야... 어머니는 아마 집착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 같아. 그래서 자식에 대한... 나에 대한 집착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버거워지더라고... 훗! 만약 이런 게 사랑이라면... 그 따위 것 나는 안 하고 혼자 편하게 살련다... 점점 이렇게 생각이 굳어졌지 머... 거봐... 감당 안 되지? 그만할까?"
"아니야... 미안해... 내가 아픈 데를 들쑤신 것 같아서 미안해서... 그랬어... 미안해... 계속해..."
"두 분의 싸움은 지금까지도 똑같아... 어머니는 거의 알코올중독 수준으로 매일 술을 마시고... 취하면 신세한탄을 하며 아버지의 바람피운 과거를 무한반복재생하고 있지... 그리고 그 끝은 항상 사무친 외로움으로 끝났어... 내가 독립해서 집을 나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내가 중재도 하고, 두 분의 감정쓰레기통 역할도 하면서 겨우겨우 뿔뿔이 안 흩어지고 지내왔는데... 그러다 보니 지금도 두 분이 내 얘기에 꼼짝도 못 하기는 해... 그런데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언제부턴가 나도 두 분의 행태가 지긋지긋해지더라고... 음... 정확하게는 문제가 생기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무책임하게 회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나한테서 발견하고 나서부터라고 할까... 피는 못 속이겠더라고... 그때 깨달았지... '아... 나라는 인간은 한 가정을 건사할 만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구나... 아니... 그보다는 책임지는 것을 못하는 사람이구나...'라고 말이야. 그리고 이 망할 놈의 유전자는 내 대(代)에서 끊어내야겠다고 생각했어... 자연히 결혼이라는 선택지는 내 안에서 항상 오답이 됐지 뭐... 연애도 싫고...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결혼은 최악의 제도였어.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 산다는 것은 끔찍한 형벌 같았지... 그래서 혼자 살기로 결심했어."
은영은 방금 그의 입으로 직접 들은 얘기 속 짐들을 어린 나이에 혼자서 짊어지고 살아왔을 어린 석원이 떠올라 안쓰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마도 모성애라는 게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한(恨)을 필터 없이 그대로 100% 온몸으로 받아와서 그런지... 여자가 싫어지더라고... 특히 술 마시는 여자는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더라...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 또 필연적으로 술을 마시게 되잖아... 그런데 나 생각보다 술이 잘 받는 체질 같더라고... 어머니가 매일 술 마시는 것을 봐와서 그런지... 술이 만만한 거 있지... 사실 이런 내가 마흔 살까지 살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 그래서 몸이 망가지는 것은 상관 안 하고 마치 마흔에 생이 끝나는 것처럼 계속 술을 마시고 살았지 머... 그런데 이렇게 마흔 살 생일파티를 두 번이나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어머... 얘... 무서워... 무슨 소리니... 니가 뭐 어디가 어때서? 나 같은 사람도 잘 살고 있고만..."
"흐흐흐. 그래서 내가 누나를 좋아하잖아... 누나를 보고 있으면 살 자격이 있나를 고민하던 내가 안 떠올라... 누나 그거 알아? 나이가 들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생각도 변한데... 아 이미 마흔 중반이시니 잘 아시겠구나..."
"야! 됐어! 그만해... 나보다 니가 더 취한 거 같다... 그만해!"
"알았어! 알았어! 자 이거 하나만 마지막으로... 내 조카 자랑은 하고 끝내야지... 난 형제가 남동생 하나거든... 그런데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고... 결국 망할 유전자는 대를 이어 내려가 버렸어... 나 하나 결혼 안 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더라고... 칫,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지? 결국 내 계획은 실패했는데... 그런데 정말 웃긴 게 뭐냐면... 그 조카 녀석이 외모는 어릴 때 동생 모습을 빼다 박았거든... 그런데 성격은 나 어릴 적이랑 똑같은 짓을 하는데... 그게 그렇게 신기하고 가슴 뭉클하데... 내 자식도 아니고 조카일 뿐인데도... 그게 유전자의 힘이겠지? '핏줄이 땡긴다'는 어른들 말이 뭔지 알 것 같더라... 그래서 요즘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받은 상처에 평생 동안 꽁해 있었던 것 같아… 누가 '꽁생원' 아니랄까 봐~! 흐흐흐… 만약에 내가 생각을 고쳐먹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서 가정을 이루고 산다면 상대는 아마 누나 같은 사람이 될 거야..."
은영은 석원의 마지막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석원아...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누나 보고, 조카도 생각해서 그냥 열심히 살아...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잖아...."
"그렇지? 그렇겠지? 휴~ 어때... 누나? 나도 소설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소설가?"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뭐~? …… 야... 이 씨! 너 이리 와! 이게 누나를 놀려! 이리 와 너! 딱 거기서! 딱 거기서!!"
"하하하! 누나... 누나... 누나... 아니야... 아니야... 오오... 진정해... 진정해... 잠탱이 씨 진정하세요... 오오...! 이렇게 뛰면 아랫집 상전이 시끄럽다고 올라와! 욕한다고 욕해... 그만해! 그만해!"
"야! 내가 바로 그 아랫집 상전이거덩! 이게 진짜 누나를 자꾸 놀려! 야! 너 이리 안 와!"
석원과 장난을 치면서도 은영은 '아랫집 상전'이라는 말에 묘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엄숙해진 분위기에 석원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는 듯했지만, 은영은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인 것을 알고 일부러 더 장난을 받아줬다. 은영은 석원이 자신의 얘기를 할 때, 그의 눈가에 맺힌 작은 반짝거림을 보았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쑥스러움을 벗어나보려는 석원의 노력이 가상했기에 일부러 더 오버해서 달아나는 그의 뒤를 쫓았다.
"야! 됐어... 그만하고... 이제 치우자... 나도 집에 가련다. 이제는 체력이 딸려서... 안 되겠다..."
"그래! 누나... 앉아서 좀 쉬어... 우리 집이니까 치우는 건 내가 할게... 앉아서 좀 쉬어.. 쉬세요... 이팀장님...!"
"어이구... 진짜 저게 처 맞을라고 용을 쓰네... 용을 써! 나 커피 시킬 건데... 너는 디저트 뭐 마실래?"
"그럼... 나도 아이스로 하나 시켜줘..."
"오케이~"
은영은 다시 배달앱으로 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정리를 도왔다. 얼마 후, 배달이 왔는지 초인종이 울렸다.
"어! 내가 나가볼게..."
석원이 후다닥 인터폰 화면 앞으로 갔다.
"어! 앞 집 아주머닌데... 이상하네... 앞 집 아주머니가 왜 오셨지? 표정에 화가 잔뜩 나셨는데"
"우리가 너무 시끄러웠나?"
"글쎄... 잘 모르겠는데... 우선 누나는 주방에서 가만히 있어..."
"알았어... 쥐 죽은 듯이 있을게..."
석원이 문을 열고 나갔다. '삐리릭...'
"아!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저희 집이 너무 시끄러웠나요? 죄송해요... 오늘이 제 생일이라서... 좀 시끄러웠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주의할게요..."
석원은 문을 열면서 동시에 석고대죄하듯이 문 앞에 서있는 여성에게 사과부터 했다.
"아니... 총각 그게 아니고... 아까부터 왜 자꾸 우리 집으로 404호에서 시킨 배달 왔다고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거야?"
"예?"
석원이 어안이 벙벙해져 되물었다.
"아까도 몇 번을 404호에서 시킨 배달 왔다고 문을 열어달라고 하더라고... 내가 그래서 난 모른다고 일단 문은 열어주는데 우리는 시킨 적 없다고 몇 번 그랬는데... 지금 또 우리 집 인터폰으로 똑같이 공동현관문을 열어달라는 거야..."
"어... 어... 그게 저..."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라이더가 도착했다.
"마침 왔네... 아저씨... 왜 404호에서 시킨 배달을 403호로 인터폰을 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거예요?"
"네? 아! 여기 배달 요청사항에 '앞집에 놔주세요'라고 쓰여 있어서요..."
"네?"
석원과 함께 안에 잠자코 있던 은영은 동시에 놀랐다.
말하기도 좀 그렇지마는
영문을 모르는 라이더는 자신의 할 일을 마치자 바로 퇴장했다. 그리고 석원은 자기가 한 잘못이 아니지만 앞 집 아주머니께 연거푸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은영은 얼른 배달앱을 확인했다. 배송메모를 다시 보니 분명히 '앞 집에 놔주세요'라고 쓰여있었다. '헉!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히 집 앞에 놔주세요라고 썼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언제부터 이런 거지'
그동안 은영이 집으로 배달시킨 모든 메모에 전부 '앞 집에 놔주세요'라고 적혀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 지난번 세영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저... 공동현관에서 304호 왔다면서 문 열어달라는 인터폰이 이상하게 자꾸 저희 집으로 오는데요... 왜 그럴까요?"
은영은 아차 싶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인터폰 시스템 오류가 아니었구나... 아... 앞 집에 내가 완전 상전, 빌런, 꼴통 짓을 다하고 있었구나... 헉!'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택배들은 배송메모 같은 거 상관없이 주문자 동호수만 보고 휙 던져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배달앱에서는 우리 일 잘하시는 사장님들이 배송메모를 꼼꼼히 체크하시고 일부러 '303호 배달', '403호 배달'... 이렇게 손수 수기로 적어서 배송을 보냈던 거라는 것을 영수증을 보고 나서야 알아챘다. 은영이 주방에 숨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있는 동안 석원은 앞 집 아주머니를 겨우 달래서 보내고 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왔다.
"미안해... 난 분명히 '집 앞'이라고 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앞 집'으로 잘못 썼더라고..."
"아휴~ 잠탱이 씨... 잠이 많이 모자라셨나 보네요..."
"아... 그러니까 '집 앞'을 '앞 집'으로 잘못 써놓고 여태껏 보고 싶은 대로 본 거라니까..."
"알았어... 그럴 수도 있지 머... 됐어..."
은영은 당장 내일 마트에 가서 세영에게 사과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