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사는 그 집!

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제10화)

by 철없는박영감

<지난 이야기 마지막>


"하하하하하! 누나 진짜 재밌는 사람이네요...!"


은영과 석원은 어느새 누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동네 카페에 마주 앉아 있었다.


"석원 씨도 한 번 생각해 봐요... 여자 혼자 살면 작은 것 하나도 얼마나 무서운데요... 특히 해가 지고 나면 무서운 게 배가되요..."


은영은 역시나 아직은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너무 갑자기 반말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뼛속까지 유교걸' 코스프레라는 것을 자신은 물론 알고 있고 그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창피해서 가면 뒤에 자기를 숨기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했다.


"우리 누나가 그동안 이렇게 불안해했다면 동생 된 도리로 가만히 있을 수 없네요..."


석원은 또 이쁜 말만 골라하는 특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니가 사는 그 집!


은영은 혼자서 마음고생 해 온 일화를 재미있어하는 석원과 점점 친해졌다. 나이 셈법이 바뀌지 않았다면 석원은 마흔한 살이라고 했다. 하지만 은영과 있을 때면 일부러 아직 생일이 안 지나서 서른아홉 살임을 강조하며 마흔네 살의 은영을 놀려댔다. 그리고 곧 두 번째 마흔 살을 맞이한다고도 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만난 석원은 희미했던 멍뭉미가 선명해져 있었다. 귀여울 때는 귀엽다가도 가끔씩 주인을 지켜야 하는 용맹한 충견의 눈빛을 보일 때도 있었다. 그 뒤로 은영이 마트에 다녀오면서 발견한 석원의 담배 피우는 모습은 변해있었다. 벤치에서 마치 은영의 집을 바라보듯이 위를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은영이 가끔씩 환기하려고 문을 열다가 벤치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원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석원은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가 꼬랑지를 사정없이 흔들 듯 반갑게 크게 손을 흔들었다. '뭐야? 우리 집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거야?' 창가 책상에서 글을 쓰다가도 가끔씩 창밖을 바라보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원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은영은 석원을 향한 마음이 눈덩이를 굴리듯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진 못했다. 얼마 후, 석원의 숙소에 부장이란 빌런 녀석이 가족과 같이 살게 되며 퇴소했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후배는 몇 개월 열심히 일하는가 싶더니 꿈을 찾겠다며 퇴사했다고 했다. 그래서 숙소에 혼자 살게 되었다고 했다.


은영은 이번엔 진짜 누나의 마음으로 석원의 식사가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수시로 드나드는 혼자 사는 집에 밥 먹으러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은영은 자기 집 냉장고의 반찬을 조금씩 석원에게 갖다 주기 시작했다. 물론 전부 엄마가 장만해 준 반찬들이었다. 결국 엄마의 의심을 사게 됐지만 은영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엄마는 먹든 말든 딸 내 집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 넣었지만, 저녁식사 때마다 굳이 다시 가져오는 딸내미가 야속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도로 가져오기는커녕 먹는 속도가 두배로 늘었었다. 저녁 먹으러 와서는 도리어 냉장고를 뒤져 반찬들을 챙겨갔다. 이건 어디서 눈먼 놈 하나가 걸려든 것이 분명했다. 엄마는 짐짓 모른 척하고 반찬을 더 정성스럽게 준비해 줬다. 어떤 놈팡이인지…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 궁금한 것 천지였지만 우리 딸을 이뻐해 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석원의 두 번째 마흔 살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은 부모님께 밖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석원의 집에서 생일축하파티를 하기로 했다. 미역국은 은영이 직접 끓였고, 케이크도 미리 사다 놨다. 석원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배달음식을 시켜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술도 한 잔 하기로 약속했다.


한 시간 후면 집에 도착한다는 석원의 문자를 보고 은영은 배달앱으로 음식을 주문했다. 배달이 제시간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시간을 확인해서 주문을 마쳤다. 특히 은영은 배달앱에서 주소를 입력할 때 실수를 잘했기 때문에 304호를 404호로 잘 꿨는지 몇 번씩 꼼꼼히 체크했다. 얼마 후, 석원의 올라와도 된다는 문자를 받고 은영은 미역국과 케이크를 챙겨서 윗 집으로 향했다.


음식은 석원이 퇴근했을 때 이미 배달이 된 상태였다. 그것을 석원이 식탁에 잘 세팅해 놨다. 은영은 쓸만한 그릇이 없어 집에서 가져온 종이용기에 미역국을 담아냈다. 그리고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생일축하노래를 불렀다. 은영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영 낯설고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마흔 줄에 고깔모자에, 파티안경까지 끼고 해맑게 웃고 있어야 하는 석원은 더 큰 창피함을 무릅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하하. 고마워요. 누나! 이건 진짜 미친 짓인 것 같아..."


"그러게 나도 또 하라고 하면 차라리 접시물에 코 박고 죽으련다..."


은영과 석원은 어느새 말을 놓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중년 두 명의 숨 막히게 깜찍한 생일축하 세리머니가 끝나고, 은영과 석원은 배달시킨 음식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은영은 건강상 문제로 한동안 술을 끊었었는데, 실로 오랜만의 술자리였다. 술자리에 취기가 퍼지며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그런데, 너처럼 잘생기고 목소리도 멋진 애가 왜 혼자 사니? 부모님이 가만 계시니?"


"돌싱이냐고? 그게 궁금한 거지?"


"어머! 너 결혼했었어? 그래? 돌싱이야? 진짜... 내가 그건 생각 못했네..."


"아니야...! 흐흐흐. 그러는 누나는? 누나는 왜 혼자 살아?"


"쳇! 얘 말 돌리는 것 좀 봐... 내가 먼저 물어봤거든요... 꽁생원 씨! 에잇! 기분이다. 이 누나가 먼저 얘기해 줄 테니까... 듣고 나면 너도 꼭 해줘야 돼!"


"알았어요... 잠탱이 씨! 그런데 나는 '꽁생원'이고, 누나는 귀여운 척 '잠탱이'면 수지가 안 맞는 것 같은데... 내가 손해 보는 느낌이야! 흐흐흐"


둘은 점점 서로를 별명으로 부를 정도로 막역해지고 있었다.


"음... 뭐부터 말해야 할까? 너 그거 아니? 여자애들은 철들기 시작하면 묘한 소외감을 느낀다... 그래서 사춘기에 외로움을 진짜 많이 타는 것 같아. 요즘은 중2병이라고 하던가... 특히 '우리 딸 언제 시집보내나'하면서 부모님이 슬슬 자기들도 모르게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눈에 보이거든... 그 기분이 진짜 이상해... 꼭 버려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나쁘게 생각하면 팔려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성인이 되려면 멀었는데 말이야..."


"......"


"나는 아직 엄마, 아버지 딸 이은영인데... 마치 어느 집안 며느리... 어떤 사람 와이프... 누구누구 엄마... 점점 이은영이 아니게 될 거라는... 앞으로의 길은 하나밖에 없고,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대하는 게 답답하고 너무 싫더라고... 그래서 학교 마치고 사회생활 시작하면서 나는 앞으로 '이은영'으로 혼자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었어... 그러다 보니 당연히 결혼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내 존재이유를 증명하려고만 애썼지... 하다 보니 작은 성공도 여러 번 하고... 나름 잘 나가게 되더라고..."


"오..."


"너 혹시 '유O즈'보니? 나 거기도 출연했었다? 여성최초 OO기업 생산 팀장 타이틀 획득이라면서..."


"아~! 맞아... 나 그거 봤어... 아... 맞다 맞아... 거기서 봤구나... 어쩐지 누나 처음 볼 때부터 낯이 익다고 했더니 거기서 봤구나... 아 그랬구나... 그런 거였어... 캬... 근데 확실히 여자들은 화장발이구나? 그러니까 내가 단번에 못 알아보지... 크크크크"


"네 이놈 네 놈이 정녕 이 족발 뼈다귀로 처맞고 싶은 게냐? 너 같은 놈들 수십 명이 내 발밑에서 설설 기었었어... 조심해... 경고야!"


"네, 잘못했습니다. 이 팀장님. 하시던 말씀 계속하시지요..."


은영은 잠깐 눈을 흘기고 말을 이어갔다. 그 뒤로 퇴사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이 나이에 조직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아줌마'가 아닌 '이은영'으로 불릴 수 있는 業을 생각하다가 작가지망생이 된 사연을 얘기했다. 석원은 조금 더 진지해진 표정으로 은영의 말을 들었다.


"자 내 얘기는 여기까지... 어때? 이 누나가 이제 좀 달라 보이냐?"


"누나도 고생 많았구나... 그동안 고생 많았어 누나..."


그러면서 석원이 갑자기 은영을 꼭 안아주었다. 은영은 얼떨결에 석원의 품에 안긴 것이 어이없으면서도 그동안 누구한테 이렇게 따뜻하게 안긴 기억이 있었나라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느껴본 알코올 도수 있는 액체의 취기도 한 몫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에 금방 석원을 밀쳐냈다.


"이 녀석, 아무리 술기운에 이 누님이 이뻐 보여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덮치려고 하면 못쓰지! 떽!"


은영은 일부러 웃긴 상황으로 마무리하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난 그냥 위로하려고 그런 거지... 뭘 덮쳐! 덮치기를... 누나가 나한테 여자인가? 누난 내가 남자야? 누나야 말로 술이 과하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드시죠? 잠탱이 씨"


고맙게 석원도 같이 너스레를 떨어주었다. 하지만 석원의 마지막 말은 은영을 씁쓸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 그럼 이제 니 얘기도 해야지..."


내 이름은 '공석원'


은영은 혼자만의 씁쓸함은 묻어두고 석원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나는 누나처럼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라서... 누나처럼 재밌지 않을지도 몰라..."


"그런 건 걱정 마시고... 시작이나 하시죠... 꽁생원 씨!"


"아~ 진짜 별명 괜히 가르쳐줬어... 내 친구였으면 그 별명 부르는 순간 최소 전치 4주였어... 누나니까 봐주는 거야... 경고야!"


"알았어... 알았어... 또 말 돌리지 말고... 자 이제 진짜로 니 얘기 좀 해봐...!"


"난 그냥 조용한 애였어... 특별히 잘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했고..."


"에이... 그게 뭐야... 사춘기 때 안 그런 사람이 어딨어... NG! NG! 다시 시작해..."


"아... 이거 안 먹히네... 진짜 누나한테는 못 당하겠다! 역시 작가는 다르구나..."


"자 너의 진짜 얘기를 들려주세요... 공석원 씨!"


은영이 젓가락 마이크를 석원의 입에 갖다 대며 눈을 반짝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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