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제9화)
<지난 이야기 마지막>
마트 가는 것이 일상 루틴이 되어 가며 그날도 은영은 기분 좋게 마트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석원을 발견했을 때, '아 역시... 담배를 피웠구나... 건초냄새의 정체가 담배였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싫어했던 담배냄새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은영은 조금 많이 놀랐다.
석원의 담배 피우는 모습은 해로워 보이지 않았다. 침을 뱉을 것 같지도, 꽁초를 함부로 버릴 것 같지도, 무엇보다 껄렁해 보이지도 않았다. 회사 다닐 때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팀원을 찾으러 가 본 흡연 장소에서 은영은 불결한 환경 못지않게 성실해 보이던 후배들의 껄렁한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시던 '멀쩡한 애들도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이상해진다는 말이 이런 모습을 말하는 거구나'라고 실감했었다.
그런데 석원의 입에서 선선한 가을 공기로 날려 보내는 담배연기는 석원의 분위기를 해롭지 않게 가을남자로 바꿔주고 있었다. '어쩜 담배 피우는 모습도 저렇게 매력적이냐...' 은영은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게 만드는 석원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동시에 '아~ 저 앞을 지나가야 하는데...'라는 생각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어! 은영 씨? 맞죠? 안녕하세요!"
그 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려왔다.
사춘기(思春期)? 사추기(思秋期)? 어쨌든 질풍노도(疾風怒濤)
"아... 네! 안녕하세요..."
은영은 갑작스러운 석원의 인사에 깜짝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대답을 해버렸다. '어쩜 이 남자 눈썰미까지 장착되어 있네...' 모자에, 마스크에, 안경까지... 절대 알아볼 수 없을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모르는 척 슬쩍 지나갈 작정이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앞으로 엄청나게 서먹한 사이가 됐을 뻔했다. 연예인들이 이러고 다니는 거... 분명히 파파라치한테 아닌 척하고 일부러 걸리려고 하는 짓이 분명했다.
"저녁 준비할 장 봐 오시나 봐요?"
석원은 담뱃불을 끄고 손으로 주변의 연기를 흩어버리며 말을 걸어왔다. 어쩜 그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개인용 재떨이를 들고 있었다. 보통 한국 남자들은 담뱃불을 끌 때 한 손으로 틱틱 재를 떨어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침을 뱉으며 바닥, 특히 배수구로 꽁초를 버렸다. 집중호우 때마다 발생하는 배수구 역류원인의 8할은 꽁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 네... 저녁 식사 하셨어요?"
은영은 형식적이지만 진심을 담아 대답하는 동시에 '사람이 어쩜 저래~ 저녁 안 먹었다고 하면 내가 차려줄까?'라고 또 망상에 빠져드는 중이었다. 은영의 속에 들어갔나 나온 듯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해 내는 석원은 동화 속 왕자님이 되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리고 곧바로 이사떡에 붙였던 메모가 떠올랐다. '헉! 어쩌면 그 메모 때문에 밖에서 개인용 재떨이까지 준비해 가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건가?' 은영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그동안 저희가 집 안에서 담배를 피워대서 많이 힘드셨죠? 셋 다 흡연자인데... 물어보니까 그동안 숙소라는 해방감 때문에 다들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 집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말자고 합의했습니다. 그동안 불편을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저... 아... 네... 감사합니다."
석원의 사과에 은영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역시나 그놈의 거짓말 메모 때문이었다. 은영은 무슨 말을 해서 정정해야 하나 한참 고민했지만 결국은 '네 감사합니다'라는 대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변명을 해보려고 해도 대외로 발송해 버린 공문서 내용수정은 불가능했다. 거짓임이 밝혀지면 징역형에 처해질 거라고 스스로 마음속에 '땅땅땅' 법봉을 내려쳤다.
은영은 석원과 그렇게 헤어지고 돌아와, 장 본 것들을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은영은 지금 알고 싶지 않고, 느끼고 싶지 않은 이 아쉬운 감정을 달래야 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혼자는 살아갈 수 없는 건가?'라는... 아니 아니! 차라리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장악해 버렸다. 남편과 아이가 있는 주부 코스프레... 그 페르소나에 은영은 점점 연기력만 늘어가고 있었다.
그 뒤로 아파트 앞에서 석원의 모습이 자주 관찰되었다. 그때마다 은영은 멀리서 그가 들어가기를 기다리거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죽이다가 들어가곤 했다. 그날도 은영은 거짓 코스프레의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파트 단지 주변을 두 바퀴 돌았다. '이쯤이면 들어갔겠지?'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아까 신호등 삼거리에서부터 왠지 누군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발걸음을 늦춰보기도 하고 왼쪽으로 가려다 오른쪽으로 갑자기 방향을 바꿔보기도 했지만 같은 인기척이 계속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공동현관에 도착했을 때,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그 인기척이 은영의 뒤에서 번호 누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지? 어떡하지?' 은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젊은 남자 한 명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앞 집의 멀쩡한 오세영을 꼴통으로 의심했던 전적이 있었던 은영은 또 너무 오버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그냥 비밀번호를 눌렀다. 같은 동에 사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은영은 계단으로 다녔기 때문에 젊은 남자는 당연히 엘리베이터로 향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 뭐지? 진짜 뭐지? 왜 계단을 따라오지? 왜! 도대체 왜!' 은영은 점점 무서워졌다. 2층에 거의 도착할 때쯤, 다행히 위쪽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석원이었다.
은영은 세상 반가워하며 엄청 친한 사이라는 듯이 일부러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그를 향해 달려들 듯이 다가갔다.
"어머! 석원 씨, 안녕하세요!"
"아! 은영 씨 안녕하세요. 운동 다녀오시나 봐요?"
아마도 단지 주변을 이미 두 바퀴나 돈 은영의 행색을 보고 짐작한 듯했다. 계단 오르기가 다이어트 운동으로 각광을 받고 있기도 했다. 석원의 시선은 자연스레 뒤의 젊은 남자에게로 옮겨갔다. 석원과 남자의 시선이 마주치는가 싶더니 남자는 곧바로 2층 복도로 몸을 피하는 듯 재빨리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은영은 조금 안심이 되어 석원에게 돌아서며 다시 말을 걸었다.
"담배는 조금 전에 피우시는 것 같던데... 어디 가시나 봐요?"
"네!? 그걸 어떻게...?"
석원의 움찔하는 반응에 은영은 '아차!' 싶었다. 안도한 마음에 솔직함이 터져버렸다.
"아니... 그게... 저기...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저기... 저기에서..."
은영은 곧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변명하기를 포기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석원의 얼었던 표정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띠리릭' 하고 석원과 은영의 스마트 폰에서 동시에 알람이 울렸다. 이 동네에서는 스마트폰에서 두 사람 이상 동시에 알람이 울리면 100% '안전안내문자'였다.
"정말 개념도, 사람도 시도 때도 없이 실종되네요..."
은영은 뻘쭘함에 아무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혼잣말을 나직이 읊조렸다. 하지만 은영의 앞뒤 맥락 없이 내뱉은 말에 석원의 웃음이 터졌다. 은영은 석원의 웃음에 살짝 안심이 됐다. 그리고 석원도 사과폰을 쓰는 구나라는 생각에 흐뭇해지고 있었다.
니가 사는 그 집!
"하하하하하! 누나 진짜 재밌는 사람이네요...!"
은영과 석원은 어느새 누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동네 카페에 마주 앉아 있었다.
"석원 씨도 한 번 생각해 봐요... 여자 혼자 살면 작은 것 하나도 얼마나 무서운데요... 특히 해가 지고 나면 무서운 게 배가되요..."
은영은 역시나 아직은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너무 갑자기 반말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뼛속까지 유교걸' 코스프레라는 것을 자신은 물론 알고 있고 그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창피해서 가면 뒤에 자기를 숨기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했다.
"우리 누나가 그동안 이렇게 불안해했다면 동생 된 도리로 가만히 있을 수 없네요..."
석원은 또 이쁜 말만 골라하는 특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