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제8화)
<지난 이야기 마지막>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면서 어제 이상해 보였던 계량기 낙서가 은영의 눈에 한번 더 들어왔다.
"'꼴통 2.1'. 저게 무슨 의미일까?"
호기심은 은영의 태세전환을 빠르게 만들었다. 설렘 가득한 여고생에서 이번엔 호기심 가득한 모험자가 되었다. 낙서를 보며 우연히 본 앞집의 전기계량기는 은영의 집보다 아무리 못해도 3배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 집에 사람이 있는가 보다.'
은영은 다시 집에 들어가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에게 이년 저년 욕을 해댔던 할머니를 마주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갑자기 머리채라도 잡히면 어떡하지 걱정이 앞섰다. '아니야. 그래도 혹시 학대받는 사람이라면 탈출이 간절해서 그랬을 수도 있어...' 은영은 앞 집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기 위하기 위해서라도, 아니 그보다는 자신의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반드시 확인이 필요했다.
"딩동~!"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은영은 떡이 올려진 쟁반을 방패라도 삼은 듯 바짝 몸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나마 문이 열렸을 때 간격을 유지해 줄 수 있는 도구는 지금으로서는 쟁반밖에 없었다. 어? 그런데 개 짖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는데 인기척은 없었다. 은영은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도대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정체가 뭐야?
다시 한번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개 짖는 소리가 더더욱 요란해졌다. '전기계량기가 저렇게 빨리 돌아가는데 사람이 없다고?' 전기계량기 앞에서 은영은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아무도 없는 자신의 집과 비교해 봤을 때, 그리고 같은 평수의 아파트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절대로 사람이 없을 수 없는 전기사용량이었다.
'에잇! 뭐... 그냥 나오기 귀찮은가 보지...' 은영이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안에서 짖고 있는 개를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여자 목소리였다. '엥?' 은영은 앞 집만은 문고리에 이사떡 쇼핑백을 걸고 오면 안 되겠다는 싸한 촉이 왔다. 꼭 만나서 떡을 주면서 염탐을 할 필요가 있다는 고집을 부려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집에 사람이 없는 척을 하고 있으니 억지로 열려고 했다가는 지난번 앞 집 할머니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꼴이니 오늘은 일단 한 발 물러서야 했다. '하... 이게 뭐지? 왜 불안감이 가시질 않는 거지?' 은영은 원래 이런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쿨한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몸이 아프고 쉬는 동안 성격도 변한 건가 싶을 정도로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안전안내문자'였다.
『[서울경찰청] OO구에서 배회중인 홍길동씨 (남, 86세)를 찾습니다. 166cm, 55kg, 파랑점퍼, 검정바지, 검정모자, 검정운동화 vo.la/OOOOO/☎182』
은영은 브런치스토리의 자신의 글에 '라이킷'수가 늘어났음을 알리는 줄 알고 반가운 마음에 스마트폰을 열었다가 '안전안내문자'에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사 와서 바뀐 풍경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안전안내문자'였다. 전에 살던 곳에서도 폭염, 미세먼지, 화재나 지진으로 재난문자가 오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실종자를 찾는다는 문자는 여기서 처음 받아봤다. 횟수도 하루에 적어도 세 번 이상, 많게는 열 번이 넘는 날도 많았다. '그래 노인분들 실종되는 것보다 아예 누가 와도 문을 안 열어주고 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은영은 그런 생각으로 앞 집 문고리에서 슬쩍 빼왔던 쇼핑백을 다시 걸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로 이사 온 수도권에는 '초고령화 사회'라는 현실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은영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공단지역에서 거주한 탓도 있었고, 아침에 출근해서 야근까지...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낮 시간에 하천변을 따라 산책하며 돌아본 동네에는 딱 봐도 70대가 넘는 노인들 거의 전부였다.
삼삼오오 벤치나 정자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거나... 이어폰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끄럽게 뽕짝을 틀어놓고 운동기구에 매달려 있거나... 이미 술에 거나하게 취해 생각나는 대로 아무 가사나 만들어 노래를 부르며 고성방가를 하고 있었다.
"자~! 떠어 나자! 동해바다로~! 산들산들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고래사냥' 노래에 이런 식의 들리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하는 개사였다.
며칠 후, 은영은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이웃에 대해서 알게 된 사실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일단 아랫집은 낮 시간에는 비어있는 것 같았고, 직접 보지를 못해서 정보가 많이 부족했다. 윗 집은 아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이런 푼수기가 남아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윗 집은 회사 숙소로 사용하는 집이고, 남자 셋... 부장, 후배 그리고 '아~ 공석원 씨'가 살고 있으며, 규칙적으로 나던 층간소음은 교대근무시간 때마다 났던 것으로 밝혀졌다.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가래침을 뱉는 빌런이 골치였는데... 직접 들은 목소리로 추정하건대 부장이라는 녀석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앞 집...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할머니... 남자... 여자... 강아지... 이렇게 넷이 살고 있으며... '꼴통 2.1'이라는 낙서의 주인공이 살고 있는 집이고, 전기를 엄청난 게 쓴다는 정도였다. 그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디...? 밖이니...?"
"아... 집 앞 마트에... 상추하고 사과 좀 사러 왔어요."
"그래? 반찬 주려고 너희 집에 가는 길인데... 언제 올 거니?"
"그래요? 근데 엄마 나 반찬 필요 없다니까요... 어차피 엄마, 아부지 드시는 거는 간도 세고, 기름기도 많아서 나는 그거 먹었다가는 아파서 앓아누워요... 밑반찬 하지 마시라니까..."
"그래도... 냉장고 아깝게 텅텅 비워 놓으면 뭐 해? 일단 넣어 놓고 안 먹으면 나중에 저녁 먹으러 오면서 도로 갖고 와. 그러면 돼지 뭐!"
"알았어요. 지금 다 사고 계산하는 중이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가요."
"그래 알았어 나는 거의 도착했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은영은 계산을 끝내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공동현관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이사 오고 바뀐 습관이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다. 3층으로 저층이기도 하고, 운동도 할 겸 무거운 것을 옮기지 않는 한 거의 대부분 계단을 이용했다. 2층을 지나 3층을 오르는 데 방화문 너머로 엄마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우리 앞 집에 사셨구나..."
"아니요... 여긴 우리 딸 집이고, 나는 저기 102동..."
"그런데 왜 안 들어가시고 여기 서 계세요?"
"아휴~ 지난번 어머님 일로 얘가 비번을 어렵게 바꿔놨어요. 그래서 지금은 나도 몰라서 이렇게 서 있어요. 호호호"
은영은 깜짝 놀랐다. 엄마의 대화 상대는 앞 집 남자인 것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개인정보를 술술 말해주고 있었다. 은영은 얼른 엄마의 말을 끊었다.
"엄마!"
"어! 은영아... 빨리 왔네?"
"엄마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은영은 엄마의 말을 끊자마자, 앞 집 남자의 시선이 느껴져 땅바닥을 보며 차갑고 건성인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저희 어머니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아... 네... 아니에요. 그럼 저희는 이만..."
은영은 엄마의 손을 잡고 돌아서며 번호키 비밀번호를 누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 집 남자가 영 신경 쓰여 주저하고 있었다.
"저..."
그런데, 앞 집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저... 공동현관에서 304호 왔다면서 문 열어달라는 인터폰이 이상하게 자꾸 저희 집으로 오는데요... 왜 그럴까요?"
은영은 속으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시스템이 잘못됐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세상이 하도 무서워서 점잖게 대응하기로 했다.
"글쎄요... 저도 인터폰은 잘 몰라서... 시스템 문제가 아닐까요? 관리실에 문의해 보시죠?"
"아... 그렇네요..."
은영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자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남자가 신경 쓰였다. 어쩔 수 없이 은영은 한마디 더했다.
"저 지금 비밀번호 눌러야 하는데요..."
"아! 아! 네네!"
남자는 그제야 은영의 경계심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계단으로 내려갔다. 은영은 다시 번호키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지난번 사건이 있은 후 은영은 비밀번호를 8자리로 길게 설정해 놨었다. 그래서 엄마도 비밀번호는 모르고 있었다. '삐리리릭, 삐리리릭...' 평소와는 다른 알림음이 울렸다. '응?' 살펴보니 건전지 교체시기를 알리는 알람이었다.
집으로 들어온 은영은 엄마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엄마... 아무한테나 그렇게 개인정보를 알려주면 어떻게 해요? 전에 우리 집 문 열려고 했던 사람이 앞 집 할머니라는데... 혹시 무슨 일 생길 줄 알고 그런 얘기를 해요!"
"어머! 얘는 지 애미를 무슨 바보로 아나... 저분 지금 니가 장 보고 온 마트 사장님이야... 얘! "
그때 다시 '안전안내문자'가 효과음처럼 울리는 동시에 은영도 소리쳤다.
"예...!!!"
은영은 깜짝 놀랐다. 정말 깜짝 놀랐다. 앞 집 남자의 정체에 놀란 것뿐만 아니라, '안전안내문자'인 줄 알았던 알람은 은영의 글에 조회수가 만회를 넘었다고 알리는 문자였다.
"나도 엘리베이터 내리는데 마트 사장님이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 줄 아니? 나 보고는 먼저 아는 척하더라... 그리고 너 올 때까지 말동무해주고 있었어..."
엄마가 말을 하는 중에도 알림음은 계속됐다. 엄마의 말은 이어졌지만 은영은 스마트폰에 온정신이 쏠려 있었다.
"니가 엄청 쌀쌀맞게 대하길래 잠자코 있었지만... 얘! 저 사장님이 얼마나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착실하게 사는 사람인데... 뭘 염려하는지 알겠는데... 너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사람 그렇게 대하면 못써!"
엄마의 말이 끝날 때 즈음, 처음 경험해 본 '조회수 폭발', 일명 '조폭'에 은영은 더욱 화들짝 깜짝 놀라고 있었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정리해 본 엄마의 말에 따르면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대기업 팀장까지 지낸 앞 집 남자는 고령의 노모를 모시고 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집 근처에 마트를 차려서 수시로 집에 들러 노모를 살뜰히 챙기는 효자였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 '임영웅'이었다. 외모도 준수하고... 붙임성 있게 예의 바르고... 특히 노모를 모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마트를 열었다는 사연이 알려지며 동네 어머님들에게 인기 최고의 젊은 사장님으로 통하고 있었다.
마트에 갈 때마다 은영은 앞 집 남자와 마주쳤다. 아니 마트 사장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지나가는 행인 1' 정도의 존재감이었는데... 아는 사람이 되자 갑자기 존재감이 커져서 자꾸 눈에 띄었다. 앞 집 남자의 이름은 오세영이었고, 은영과는 한 살 차이 연상이었다. 갑자기 신원이 확실해지니 은영의 불안은 싹 사라졌다. 그리고 '조회수 폭발'의 영향으로 은영의 기분이 한층 업(UP)되어 있기도 했다.
그 뒤로 장 보러 가면 할인도 많이 해주고... 자주 사가는 상추와 사과는 물가가 오르면서 엄청 비싸졌지만 이웃사촌이라며 덤으로 많이 챙겨줬다. 무엇보다 한 살 연상의 또래 남자와 나누는 이런저런 대화가 은근히 재밌어졌다. 은영은 점점 마트에 가는 횟수가 늘었다.
앞 집 남자와 마주친 이후로 왠지 일이 잘 풀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마트를 가야 글이 잘 써지는 징크스 같은 것이 생기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한꺼번에 사다가 쟁여놨을 텐데... 이제는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사다가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누가 봐도 알뜰하게 살림하는 주부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춘기(思春期)? 사추기(思秋期)? 어쨌든 질풍노도(疾風怒濤)
마트 가는 것이 일상 루틴이 되어 가며 그날도 은영은 기분 좋게 마트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석원을 발견했을 때, '아 역시... 담배를 피웠구나... 건초냄새의 정체가 담배였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싫어했던 담배냄새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은영은 조금 많이 놀랐다.
석원의 담배 피우는 모습은 해로워 보이지 않았다. 침을 뱉을 것 같지도, 꽁초를 함부로 버릴 것 같지도, 무엇보다 껄렁해 보이지도 않았다. 회사 다닐 때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팀원을 찾으러 가 본 흡연 장소에서 은영은 불결한 환경 못지않게 성실해 보이던 후배들의 껄렁한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시던 '멀쩡한 애들도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이상해진다는 말이 이런 모습을 말하는 거구나'라고 실감했었다.
그런데 석원의 입에서 선선한 가을 공기로 날려 보내는 담배연기는 석원의 분위기를 해롭지 않게 가을남자로 바꿔주고 있었다. '어쩜 담배 피우는 모습도 저렇게 매력적이냐...' 은영은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게 만드는 석원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동시에 '아~ 저 앞을 지나가야 하는데...'라는 생각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어! 은영 씨? 맞죠? 안녕하세요!"
그 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려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