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제7화)
<지난 이야기 마지막>
은영은 생각보다 찾기 쉬운 떡집에 조금 놀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떡집이 많아졌나?' 은영이 학생일 때만 해도 떡집은 전통시장에나 가야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집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트로트가 다시 유행하는 것처럼,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떡이라는 것이 구닥다리 문화가 아니라 전통으로 제대로 자리 잡은 것 같아서 조금 기분도 좋아졌다. 사라짐을 발 벗고 나서 지키지 못하고 뒤에서 아쉬워만 했다는 죄책감이 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은영은 시루떡을 맞췄다. 만들어져 있는 것을 사는 것보다 더 값어치 있어 보이고 싶기도 했다. 사실 본품떡보다 포장비가 더 비싸기는 했지만 적진을 염탐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반(半) 말만 했는데도 양이 상당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그래도 직접 보니 더 많게 느껴졌다. 다행히 아버지가 떡을 좋아하시니 은영이 먹을 것 조금 남기고, 윗 집, 아랫집, 앞 집, 상황실에 돌리고 나머지는 전부 부모님께 드려야겠다 생각했다.
예쁜 상자에 포장된 시루떡을 들고 은영은 셋 중에 제일 만만한 아랫집을 우선 찾아가기로 했다. 솔직히 만만하다 보다는 그나마 제일 정상일 것 같았다. 가장 덜 화려하고, 무난하게 단정해 보이는 옷을 차려입고 쟁반에 떡을 담아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아랫집 문 앞에서 잠깐 헛기침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다음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작전개시
첫 번째 초인종에는 답이 없었다. 은영은 집에 있을 때, 누가 온다는 기대가 없으면 초인종 소리가 잘 안 들리는 경험을 해봐서 다시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다시 잠깐 기다려봤지만 집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
"뭐야~! 그동안 낮시간에도 민원 들어갈까 봐 얼마나 조심했었는데... 낮에 비는 집이었어?"
은영은 긴장이 풀리면서도 아랫집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역시 이사떡 돌리기 작전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속으로 자화자찬하며 떡상자를 쇼핑백에 넣어 문고리에 걸었다. 그리고 미리 써온 메모를 쇼핑백에 붙였다.
『안녕하세요. 윗 층에 새로 이사 온 사람입니다. 직접 찾아뵙고 전해드리는 것이 예의지만 댁에 안 계신 것 같아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이사떡만 놓고 갑니다. 이삿날 많이 시끄러우셨죠? 이해해 주신 덕분에 이사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아. 이 정도면 앞으로 크게 얼굴 붉힐 일은 없겠지? 그래 요즘 이렇게 떡까지 돌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은영은 솔직히 아랫집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해했다. 그리고 낮에 비는 집이라는 큰 정보를 얻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은영의 두 번째 목표는 어마어마한 각오가 필요할 것 같은 윗 집이었다. 은영은 잠시 집에 들러 물 한잔을 마시고 마음을 가다듬고 힘차게 계단을 올랐다.
"딩동~!"
은영은 용기 있게 올라왔지만 속으로는 '제발 없어라'와 '도대체 어떤 종자인지 면상이나 한 번 보자'라는 마음이 짬뽕되어 있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이번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응답이 있었다.
"삑... 누구... 세요?"
어! 그런데... 전에 창밖으로 흘러넘치던 소란스러운 통화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가 응답해 왔다. 자다가 깬 듯 갈라진 목소리이지만, 조금 더 젊고, 조금 더 젠틀한 느낌이었다. 은영은 긴장해서 404호가 아닌 403호로 잘못 찾아왔나 싶어서 문을 다시 살폈다.
"누구세요...?"
다시 한번 누구냐고 묻는 대답에 은영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아~네... 저기... 안녕하세요. 아랫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인데요... 이사떡도 드리고 인사도 좀 드리려고 찾아왔어요..."
"아... 네... 잠시만요..."
은영은 몹시 떨렸다. 인터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은영이 상상했던 빌런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느낌이었다. 아니 오히려 매력적인 중저음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삐리릭) 아... 안녕하세요. 새로 이사 오셨다고요..."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허겁지겁 머리를 정리한 듯한 모습으로 한 남자가 나왔다. 자다 깬 듯해서 그렇지 키도 크고, 안경 뒤 얼굴은 하얗고 피부도 좋았다. 게다가 민소매와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날카롭고 깊숙한 쇄골 라인이 눈에 띄는 호리호리하면서도 수영선수처럼 매끈하고 다부진 체격의 남자였다.
인터폰이 아닌 은영의 귀로 다이렉트로 들어온 중저음의 목소리는 '내 귀의 캔디'라고 할 만큼 달콤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은영은 상대방의 시선에서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얼른 정신을 차렸다. 짧은 순간에 그 모든 것을 스캔해 낸 자신이 어이없기도 했다.
'이 사람이 그 가래침 뱉은 빌런이라고?' 은영에게는 여태껏 본 그 어떤 반전드라마보다 더 반전이었다. 그러면서 어느덧 은영의 감각은 이 남자의 외모와 목소리에 이어 체취에 집중하고 있었다. 은영은 살면서 한 번도 건초 냄새를 맡아본 적은 없었지만, 햇볕에 바싹 마른 무해하고 살균된 느낌의 깨끗한 건초 냄새가 있다면 지금 이 남자에게서 나는 냄새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사한 지는 좀 됐는데...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이은영이라고 합니다. 여기 이사떡 좀 가지고 왔는데... 좀 드셔보세요."
은영은 쇼핑백을 내밀며, 일단 작전이 뭔가 꼬인 것은 확실했고, 내려가기 싫은 이 마음이 왜 드는 건지... 지금 왜 자기가 설레는 건지, 이름은 왜 밝히고 있는 건지... 이 모든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이 녀석이 드르륵 캭 퉤라고?' 특히 은영 상상 속의 빌런의 모습과 지금 이 남자의 모습이 전혀 매칭이 되지 않아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아... 그러세요... 저는 공석원이라고 합니다. 아... 초면에 이렇게 자다 깬 모습을 보여서 죄송하네요. 여기가 회사 숙소인데 야간 근무하고 이제 막 퇴근해서 자던 중이었거든요..."
"어머... 죄송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제가 주무시는데 방해를 했네요..."
은영은 최대한 정신이 아득한 상태를 안 들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말을 할 때마다 숨이 가빠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은영은 몸 안에서 자신의 뉴런들이 재구축되는 간질간질한 기분 좋음을 느꼈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라며 드라마 속 삼순이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환상 앞에서 20년 전에 울면서 외치던 소원을 실현해 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아직 은영에게 심장 뛸 일을 감춰두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저희가 새벽이나 밤에 좀 시끄러워서 아래층 분께 늘 죄송했는데... 이렇게 떡까지 챙겨주시고 저희가 오히려 죄송스럽네요. 부장님이랑 후배가 같이 사는데 다들 근무 시간이 달라서... 조금 많이 불편하게 해 드렸죠?"
'부장?' 아휴~ 어딜 가나 부장이란 녀석들이 문제다. 은영은 부장 녀석이 빌런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건 그렇고 '공석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자는 어쩜 말도 이렇게 이쁘게 하는지... 은영은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한국에 사는 공 씨 성을 가진 남자는 다 이렇게 매력적인 거야!' 은영은 점점 푼수기 발산의 허용치를 넘기고 있었다.
사실 은영이 알고 있는 공 씨 성을 가진 한국남자는 '공유'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듯이 대화를 질질 끌던 적이 언제였던가... '도깨비씨'에게 운명의 상대를 찾았다며 시집가겠다고... 결혼하자고... 시답잖은 농담으로 관심을 표현하던 여고생 '지은탁'이 된 기분이었다.
형식적이고 의미 없는 말들이 오가는 별 내용 없는 대화였는데도 그 어떤 예능 프로보다 즐거웠다. 석원의 희미한 멍뭉미는 은영에게 만약 반려견을 키운다면 딱 이런 멍멍이를 키우고 싶다는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게 만들고 있었다. 잠시 후, 억지로 하품을 참는 석원의 표정에 은영은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야간 근무하고 오셔서 피곤하신 분을 붙들고... 이 무슨 추태를..."
"아하하... 제가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네요..."
"그럼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잠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오다가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요..."
"네... 그러시죠... 떡 잘 먹겠습니다!"
석원은 쇼핑백을 살짝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봬요..."
"네... 안녕히 가세요..."
은영은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은영이 반층쯤 내려왔을 때, 삐빅 소리와 함께 철컥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갑자기 떡과 함께 쇼핑백에 붙여놓은 메모가 떠올랐다. '아! 맞다. 메모...!'
『안녕하세요. 아래층에 새로 이사 온 사람입니다. 직접 찾아뵙고 전해드려야 예의지만 부탁드릴 일도 있고 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이사떡만 놓고 갑니다. 부탁은 다름이 아니라, 저희 남편과 아이들이 기관지가 많이 약해서 다소 기분 나쁘시더라도 되도록 밖에서 흡연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소 건달 아니면 조폭이라고 생각했던 윗 층 빌런에게 남편 있는 여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은영은 메모에 거짓말을 써놨었다. '아이고~ 이런 맹추!' 은영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다시 올라가서 떡을 돌려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메모가 붙어 있는 쇼핑백만이라고 회수하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도대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정체가 뭐야?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면서 어제 이상해 보였던 계량기 낙서가 은영의 눈에 한번 더 들어왔다.
"'꼴통 2.1'. 저게 무슨 의미일까?"
호기심은 은영의 태세전환을 빠르게 만들었다. 설렘 가득한 여고생에서 이번엔 호기심 가득한 모험자가 되었다. 낙서를 보며 우연히 본 앞집의 전기계량기는 은영의 집보다 아무리 못해도 3배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 집에 사람이 있는가 보다.'
은영은 다시 집에 들어가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에게 이년 저년 욕을 해댔던 할머니를 마주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갑자기 머리채라도 잡히면 어떡하지 걱정이 앞섰다. '아니야. 그래도 혹시 학대받는 사람이라면 탈출이 간절해서 그랬을 수도 있어...' 은영은 앞 집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기 위하기 위해서라도, 아니 그보다는 자신의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반드시 확인이 필요했다.
"딩동~!"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은영은 떡이 올려진 쟁반을 방패라도 삼은 듯 바짝 몸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나마 문이 열렸을 때 간격을 유지해 줄 수 있는 도구는 지금으로서는 쟁반밖에 없었다. 어? 그런데 개 짖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는데 인기척은 없었다. 은영은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