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에필로그)

by 철없는박영감

눈에 뜨이는 어른마다 전부 절을 하며 세뱃돈을 두둑이 챙긴 조카는 사실 돈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여기저기 신사임당 초상화를 흘리고 다녔다. 그냥 명절에 사람들이 모여 집안의 인구밀도가 높아지는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한바탕 부모 자식 간, 형제간, 연인 간, 부부간... 세배 타임이 끝나고 다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떡국을 먹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남동생 부부는 거실에서 설 특집 프로그램을 보며 과일을 먹고 있었고, 조카는 서재에서 석원과 상제에게 마구 매달리며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 지치지 않는 체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은영도 설거지와 뒷정리를 어느 정도 끝내가고 있었다. 뭐 그릇이야 세척기가 알아서 씻어 줄 거고 은영이 할 일은 음식쓰레기 처리와 명절 선물로 들어온 선물들의 포장과 박스 분리수거 정도가 거의 다였다. 치우면서 든 생각이지만 아무리 선물용이라고 해도 이런 과대포장은 만든 회사에 벌을 좀 줘야 할 것 같았다.


제사와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한 뒤로, 명절마다 식구끼리 한 끼 먹을 정도의 음식만 장만했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음식준비로 손을 걷어붙여야 한다던가, 거하게 장을 봐야 한다던가 하는 모습은 사라졌다. 음식쓰레기도 줄이고... 돈도 아끼고... 중노동에 시달릴 필요도 없는 모두가 행복한 일석삼조의 결정이었다. 외식을 해본 적도 있지만, 명절에 집에 기름냄새는 좀 나야 사람 사는 집 같다는 의견이 있어서 이번에는 명절음식을 장만했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은영도 뒷정리를 대강 마무리하고 조카가 석원과 상제와 놀고 있는 서재로 갔다. 그리고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부터 '어린이집에서 여자친구는 몇 명 사귀었는지...'까지 온갖 짓궂은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그럴수록 조카는 은영을 피해서 석원과 상제 커플 사이에 밀착하고 있었다. 은영이 상제를 향해 말했다.


"이렇게 참하고 착한 애를 내가 치한으로 오해했으니... 그냥 늙으면 빨리 죽어야 된다니까..."


"하하하... 아니에요... 저도 가끔 거울 보면 참 험상궂게도 생겼다고 생각해요..."


상제가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이런 상제의 모습에 은영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몇 번이나 들었던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해 물었다.


"처음 본 날... 내 모습이 그렇게 사연 있어 보였니...?


"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뒤를 힐끔거리며 느리게 걷다가 빨리 걷다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걷는데... 앞질러 가려고 해도 좁은 길에 맞은편에서 계속 사람이 와서 다시 뒤로 가고... 또 억지로 밀치고 갔다가는 넘어뜨릴 것 같고... 뒤에서 따라가면서 뒤꿈치 안 밟으려고 얼마나 조심해서 걸었는지... 처음에는 취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오른쪽으로 가는 것 같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기도 하고... 그런데 또 가는 방향이 이상하게 계속 같아서... 이건 뭐지 싶었죠... 어딘가 위태위태해 보이기도 해서... 요즘 세상이 하도 무서우니까 그냥 포기하고 천천히 뒤따랐죠 뭐... 그런데 덕분에 석원이 형도 만나고 누나가 여러모로 저한테는 행운의 여신이네요..."


"아! 맞아... 그래... 내가 의도치 않게 사랑의 큐피드가 됐던 날... 아휴... 그날이 너네 처음 본 날이라고 했었지..."


은영은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석원의 표정을 살폈다.


"아~! 왜! 상제 놀리고 그래... 누나! 나까지 얼굴 빨개지겠네..."


"그래서... 처음 보자마자 반한 거야? 어디가 어떻게 그렇게 좋았어? 말해봐... 말해봐...! 둘이 눈빛이 마주치자마자 스파크가 그냥 파바박 튄 거야? 그런 거야? 응? 이야... 내가 그 순간에 감전사 안 당하고 살아남았다는 거지... 역시 행운의 여신이네... 그렇지? 근데, 야! 흐흐흐... 그래서 둘이 같이 사니까 좋아? 응? 좋아? 얼마나 좋아? 말해봐... 말해봐...!"


은영은 석원의 옆구릴 쿡쿡 찌르며 대답을 재촉하며 장난을 쳤다.


"아니... 이 누나가... 애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석원은 화들짝 놀라 정색을 하며 은영의 손을 뿌리쳤다.


"나는 창 밖에 내다볼 때마다 니가 우리 집 쪽을 보고 있어서 속으로 얼마나 설레었는 줄 알아? 응? 니가 내 마음을 알아? 알아?"


"아니 자기 혼자 착각해서 그런 걸 나더러 어쩌라고... 나는 우리 이쁜 상제 보고 싶어서 오매불망 2층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엄청 오래 기다려서 겨우 우리 이쁜이를 봤는데... 어떤 분이 갑자기 '꽁생원~' 불러서 얼마나 식겁했는 줄 알아? 상제 얘가 일에 몰두하면 몇 시간이고 잠적했다가 가끔 물 마시러 두문불출 베란다로 나왔단 말이야... 알잖아... 누나가 이사떡 돌린 날도 얘 집에 있었는데 일하느라 '쌩' 깠다잖아..."


"어머 얘 봐! 이쁜 상제? 이쁜 상제? 우리 이쁜이? 우리 이쁜이?"


은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고 감정을 실어 입술을 꽉 깨물며 석원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앗! 누나! 미안... 미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 잘못이야... 항복! 항복!"


은영과 석원, 두 만담 콤비의 쇼를 상제가 한참 재밌어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에는 앞집 오세영이 서 있었다. 은영이 현관문을 열고 그를 반갑게 맞았다.


"어떻게... 면회는 잘하고 오셨어요? 어머님은요? 편히 잘 계세요?"


"네... 덕분에... 집에서 갇혀서 지내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는 하시는데... 뭐 요양병원이 다 그렇죠 뭐...!"


세영의 어머니는 결국 요양병원에 입원하기로 결정됐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처음 은영의 집에 무단침입을 시도한 이후로도 계속 번호키 버튼을 누르며 문을 여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 CCTV 확인결과 밝혀졌다. 어느 날 외출 후 돌아온 은영이 집이 크게 어질러져 있는 것을 보고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결과 세영의 어머니가 우연히 비밀번호를 맞췄고 문이 열린 틈을 타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었다. 아마도 그동안 번호키 건전지가 빠르게 방전되었던 이유는 세영의 어머니 때문인 것 같았다. 다행히 집이 어질러진 것 말고는 큰 피해가 없어서 은영은 처벌불원서를 제출했다.


세영은 잠시 앉아서 새해 인사를 나누다가 세배도 안 받은 은영의 조카에게 세뱃돈을 뺏긴 다음, 다음날 마트 오픈준비 때문에 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구들이 떡국도 먹고 놀다가 가라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어쩔 수 없이 세영을 보내고... 잠시 후 식구들은 거실에 모여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모포를 펼쳤다. 서로의 눈치를 보는 눈가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아싸! 윷이다! 일단 업고, 저 말부터 잡아... 그렇지... 그러면 한 번 더다. 자 이번엔 뭐냐? 걸!"


그때 인터폰이 사정없이 울렸다.


"네...! 304호죠? 여기 상황실인데요... 층간소음 민원이 들어와서요..."


은영은 인터폰을 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식구들을 향해 한쪽 볼을 추켜올리고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일 떡 맞추러 가야겠다! 작전개시!"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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