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나를 잃어간다.

우리 사랑의 사계절 (제3화 : 장마와 태풍)

by 철없는박영감
장마는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혜진은 친구의 죽음 소식을 들은 날, 아이의 도시락을 싸지 못했다. 지훈은 아무 말 없이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회사로 향했다. 출장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그는 그곳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다. 3년간 준비한 프로젝트였다.


혜진은 장례식장을 지켰다. 친구의 마지막을 지키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 그녀는 그 친구를 ‘동지’라고 불렀다. 세상의 모순을 함께 분노하고, 함께 울던 사람이었다. 며칠 동안 장례식장에서 혜진은 친구의 어머니를 붙잡고 울었다.


“죄송해요. 제가 더 지켰어야 했는데…”


어머니는 혜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 아이는 혜진이를 참 좋아했었단다. 네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대.”


그 말에 혜진은 더 울었다. 그리고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비가 쏟아지던 날. 시위가 끝나고 모두 흩어졌지만, 혜진은 우산을 들고 친구를 기다렸다. 친구는 젖은 채로 도착했고, 혜진은 말없이 우산을 씌워주며 말했다.


“우리는 같이 젖는 거야. 혼자 젖는 건 너무 슬프니까.”


그날 이후, 친구는 늘 혜진의 곁에 있었다. 함께 젖고, 함께 울고, 함께 견디던 시간이었다. 그런 친구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에게 피살됐다. 이상동기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


지훈은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육아 도우미는 집안일로 갑작스레 못 온다고 연락이 왔다. 그는 결국 출장을 포기해야 했다. 다른 동료가 대신 가기로 했고, 그는 승진심사에서 탈락했다. 지훈은 뒤처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도태된 건 직장이 아니라, 삶이었다. 혜진이 장례식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지훈은 퇴사를 결심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이제는 그 길을 걷기로 했다.


“우리, 잠깐 얘기할까. 밖에서.”


혜진이 말했다.


둘은 집 근처 카페에 앉았다. 에어컨은 있었지만, 바깥의 열기와 마음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혜진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짜증이 났다.


“무슨 아이스아메리카노에 얼음만 가득 들었어?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밑바닥이 보이네.”


지훈은 조용히 말했다.


“원래 아이스아메리카노가 그런 거야.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원 샷, 약 30ml를 따뜻한 물에 타서 마시는 거니까. 따뜻한 물 대신 얼음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혜진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이혼하자.”


지훈은 놀라지 않았다. 그 말이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는 사실에,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저 컵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혜진은 웃었다.


“당신은 늘 그렇게 말하죠.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그런데 저는 늘 그렇게까지였어요.”


지훈은 말이 없었다.


그날, 비는 오지 않았지만, 둘 사이엔 이미 장마가 시작된 듯했다.


혜진은 이 사회가 친구를 죽였다고 믿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약자라는 이유로, 그 친구가 희생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훈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건 너무 단정적이야. 이건 경쟁사회가 만든 병리야.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어.”


혜진이 경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이상 대화가 어렵습니다. 그 친구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었어요. 그는 이 사회가 만든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어요.”


지훈도 경어로 답했다.


“그렇게까지 일반화하시면, 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너무 감정적인 해석이에요.”


둘은 서로를 이해시키려 했지만, 말의 결이 달랐다. 혜진은 말했다.


“저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바랍니다. 다수결이 정의가 아닌 사회. 강자가 약자를 어려워하는 사회요.”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단지 이상주의일 뿐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는 불가능해요. 희생은 필수불가결합니다. 그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멈추지 않을 뿐입니다.”


혜진은 눈을 감았다.


“당신은 늘 그렇게 말하죠. 그런데 저는, 아니 한쪽에만 그 희생이 너무 많아요. 너무 가까워요.”


카페의 유리창 너머로,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훈은 마지막 출근 날, 책상 위에 사직서를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 혜진을 마주한 카페에서 컵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제 글을 쓰려고 합니다. 그게 제 방식의 싸움이에요.”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계속 싸울 거예요. 그게 제 방식의 사랑이에요.”


둘은 마주 보고 있는 듯했지만,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지금은, 같은 기분, 같은 방향을 향해있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좁은 다리 위에서, 누군가는 밀쳐졌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그 어이없는 사라짐 앞에서, 그저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덜 아팠으니까. 결국 어느 누구도 그르지 않았다. 다 옳은 말들 뿐이었다. 다르지도 않았다. 손잡고 같이 걷고 있었으니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이 희극은, 그저 신의 ‘장난’ 같았다.


웃기엔 너무 아프고, 울기엔 너무 늦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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