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랑의 사계절 (제2화 : 초여름)
행복의 조건은 거창한 게 아니다.
초여름이었다. 봄이 잉태한 가능성들이 잎을 뻗고, 꽃을 피우며 세상을 덮는 계절. 파스텔톤으로 비어 있던 하늘은 초록빛으로 경쟁하듯 채워지고, 기온은 점점 올라갔다. 아직은 습하지 않아 견딜 만했지만, 간혹 이상기온이 찾아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혜진은 시베리아 기단으로 뼛속까지 얼어붙던 혹한기를 떠올렸다.
“그래도 얼어 죽는 것보단 낫지.”
혜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초여름의 불쾌한 열기를 견뎠다.
아이를 품은 건, 봄의 끝자락이었다. 벚꽃이 흩날리던 계절,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아이는 그 사랑의 증거처럼 찾아왔다. 그날 지훈의 자취방 라일락 꽃향기 속에서 혜진은 지훈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나 홀몸이 아니야."
"......"
지훈의 얼굴이 놀람과 기쁨 사이에서 흔들렸다. 무겁게 짓누르던 공기가, 마치 창문을 연 듯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그때 지훈의 표정을 떠올리면, 그것만으로도 혜진은 어떤 괴로움도 이겨낼 수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영혼이 충만해지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었나?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항상 'Anything Else'라는 느낌이 불만이었던 혜진은 그날만큼은 'Something Special'이 된 느낌이었다.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결정이었다. 지훈은 작가가 되려던 자신의 꿈을 잠시 접고 안정적인 직장을 잡았다. 그리고 혜진은 육아에 전념했다. 갑자기 찾아뵙게 된 지훈의 부모는 따뜻했다. 가족의 따뜻함을 처음 느껴본 혜진은 스르르 녹아내려 스며들었다.
“어릴 때 어떤 상처를 갖고 자랐든, 이제는 우리 가족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그 말에 혜진은 울컥했다. 그녀는 자신이 마침내 ‘행복’을 얻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판타지였을까.
그것은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아.
누가 봐도 행복해야 하는 혜진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거실 한쪽에 놓인 아기 침대는 혜진의 하루를 규정했다. 아이가 울면 달래고,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다시 재우는 반복. 그 사이사이, 그녀는 거울을 보았다. 초췌한 얼굴, 부은 눈, 늘어진 티셔츠. 거울 속 그녀는 낯설었다. 사라지는 건 얼굴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였다. 그녀는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훈은 퇴근 후에도 바빴다. 회사 사람들과의 회식, 프로젝트 회의, 그리고 가끔은 늦은 귀가. 그는 여전히 세련됐고, 여전히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그의 교양 있고 안정적인 모습은 빛났고, 그는 점점 자아를 실현해가고 있었다. 혜진은 그 모습이 싫었다. 그가 빛날수록, 그녀는 그림자가 되어갔다.
그러다 문득, 작은 동요가 스쳤다. 지훈이 직장 동료들과 웃고 있는 사진을 보고, 그녀는 순간 움찔했다. 그 웃음에 그녀가 없는 것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질투라고 하기엔 미묘하고, 외로움이라 하기엔 어설펐다.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 순간 혜진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물었다. 그저 따뜻하기만 했던 그 사랑이, 조금씩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칼럼에서 읽은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사랑의 초기에 상대를 이상화하며 열광에 빠진다. 과도한 도파민 분비로 행복감에 젖어 몽롱함을 겪는 시기가 지나면 사랑은 사소한 곤란으로 권태와 회의를 낳는다.”
그 말이 혜진의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녀는 다시 지훈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다정했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혜진의 마음 어딘가에는 작은 균열이 생긴 듯했다. 바로 그 균열이, 사랑이 끝나가는 예고가 아니라, 새로운 계절의 문턱이라는 예감. 그녀는 아직 그 문을 열지 않았지만,
이미 그 앞에 서 있었다.
어느 날, 지훈은 말했다.
“이번에 팀장이랑 독일 출장 갈 수도 있어. 출판 관련해서 연결이 생겼어.”
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기쁜 듯하면서도, 가슴 어딘가를 조용히 긁어내 상처를 남겼다.
“혜진아 괜찮아?”
지훈이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훈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질투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공포였다.
밤이었다. 아이는 잠들었고, 지훈은 서재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혜진은 거실에 앉아, 지훈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지훈이 있는 서재와, 혜진이 있는 거실. 그들의 대화는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감정적으로도 멀어져 있었다.
"뭐 해?"
"아~ 나 다시 소설을 써 볼까 봐? 그동안 우리 가족을 위해서 꾹꾹 참아왔는데, 글 쓰고 싶은 이 마음을 더 이상 누를 수가 없네...? 응원해 줄 거지?"
혜진은 더 답답해졌다. 그리고 조용히 독백했다. 아직도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는 미련이 남았다.
“나는 너랑 같이 있으면, 평범해지고 싶어.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해서, 회사를 다니고, 집을 장만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상상을 하게 돼. 그런데 그런 생활을 상상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져…”
그 답답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녀는 특별해지고 싶었다.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것을 내 안으로 숨겼다. 내보낼 수 있는 것은 눈물뿐이었다.
다음 날, 지훈은 아이를 안고 웃었다.
“우리 아기, 오늘도 예쁘네.”
혜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하지만, 이 아이를 통해 내가 사라지고 있다.'
그녀는 지훈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그녀를 평범하게 만들었고, 그 평범함은 그녀를 지우고 있었다. 초여름의 햇살은 따뜻했지만, 혜진의 마음은 그늘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는 숨길 수 없었다. 그 내면의 고백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불안은, 곧 균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