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멸렬

우리 사랑의 사계절 (제4화 : 늦여름)

by 철없는박영감
혜진의 정체성 혼란과 내면의 파열. 과거의 상처와 이상이 다시 떠오르며 사랑의 균열이 시작된다.


늦여름. 새벽공기조차 상쾌하지 않은 계절이다. 사실 새벽공기는 어느 계절에나 상쾌하지 않다. 낮 동안 광합성으로 산소를 뿜어내던 녹음도 밤에는 호흡을 하며 상처 난 곳을 어루만진다. 새벽을 상쾌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하루 중 가장 기온이 낮기 때문이다. 해가 뜨기 바로 직전, 다시 광합성을 시작하기 위해 세포를 깨우기 직전의 기온은 폭염에 지친 생물들에게 그나마 작은 위안이다.


하지만 늦여름의 열대야는 그마저도 힘들게 한다. 새벽녘 잠을 설친 혜진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치자, 그녀는 자신이 생각보다 더 많이 지훈에게 젖어있음을 깨닫는다.


'아~ 그 이가 견디는 방식이 이런 식인가?'


잠시 후, 지훈의 인기척을 느끼지만 모른 척하고 이 작은 위안의 시간을 오롯이 본인을 위해 쓴다.


지훈은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았다. 창문을 열면 바깥공기가 무겁게 들이쳤고, 그는 그 무게를 글로 옮기려 했다. 단어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친구의 죽음, 혜진의 눈물, 아이의 웃음 사이에서 어떤 문장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랐다. 책상 위에는 인터뷰 녹취록, 신문 기사, 재판 기록이 쌓여 있었다. 그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았다. 그 이름들이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기억하는 자가 되기로 했다. 그것이 그의 방식의 싸움이었다.


혜진은 늦여름의 열기 속에서도 거리로 나섰다. 친구가 피살된 골목에 흰 국화를 놓고, 포스트잇에 “당신을 기억합니다”라고 적었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음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실력이 되었다. 시위 현장에서는 늘 같은 얼굴들이 있었다. 그녀는 그 얼굴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꿀 것입니다. 혐오가 발 붙일 곳은 없습니다.”


그녀는 행동하는 자가 되기로 했다. 그것이 그녀의 방식의 사랑이었다.


집에서는 말이 줄었다.

지훈은 새벽에 움직였고, 혜진은 낮에 움직였다. 서로의 삶은 교차하지 않았다. 냉장고에 붙은 메모만이 둘 사이의 유일한 대화였다.


“오늘 저녁은 먹고 들어올게요.”


“아이 간식은 채워놨어요.”


“에어컨 필터 교체했어요.”


“이혼 서류, 다시 확인해 주세요.”


그들은 조용히 협의 이혼을 준비했다.


법원 앞에서 마지막으로 마주 앉았을 때, 혜진은 오랜만에 셔츠의 두 번째 단추가 열려있는 지훈을 발견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홀가분해진 탓인지, 불현듯 옛 시절을 떠오르게 한 모습 탓인지, 어느새 원인을 알 수 없던 그 답답함이 사라져 있었다. '아~ 이렇게 자유분방한 사람이 그동안 넥타이를 매느라 얼마나 답답했을까?' 측은한 마음도 들었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혜진이 말했다.


“당신은 글로 싸우고, 나는 몸으로 싸워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같은 편이었어요. 방식이 달랐을 뿐.”


그 말에 혜진은 눈을 감았다. 오래도록...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의 가정 폭력과 친구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고함과 집어던진 술병, 그 식탁 밑, 그리고 그 골목, 그 시간, 그 침묵...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 침묵을 깨고자, 그녀는 거리로 나섰다. 지훈은 사직서를 낸 날, 스마트폰에 이런 문구를 저장해 두었다.


“기억은 저항이다.”


그 문장은 그의 첫 소설의 첫 문장이 되었다. 혜진은 그날도 거리로 나갔다. 친구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그 이름이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둘은 헤어졌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여름의 열기 속에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음 계절을 준비했다. 그들이 살던 세상이라는 좁은 다리 위에서, 누군가는 밀쳐졌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그 어이없는 사라짐 앞에서, 그저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덜 아팠으니까.


결국 어느 누구도 그르지 않았다. 다 옳은 말들뿐이었다. 다르지도 않았다. 손잡고 같이 걷고 있었으니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이 희극은, 그저 신의 ‘장난’ 같았다. 웃기엔 너무 아프고, 울기엔 너무 늦은 늦여름이었다. 모든 것이 지쳐 있었지만,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 계절이었다.
이전 04화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나를 잃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