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랑의 사계절 (제5화 : 가을, 열매가 익어가는 계절)
가을이었다.
지훈은 요즘 들어 딸의 눈빛을 자주 바라보게 되었다. 그 눈빛은 어딘가 낯익었다. 말을 꺼내기 전, 입술을 꾹 다물고 생각하는 습관. 무언가를 설명할 때, 손끝이 먼저 움직이는 버릇. 그리고 친구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그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말하는 태도.
“아빠, 그건 틀렸잖아. 그냥 넘어가면 안 돼.”
그 말에 지훈은 멈칫했다. 그건 혜진의 말투였다. 그녀가 거리에서, 법정에서, 식탁에서 수없이 반복하던 말이었다.
혜진과의 이혼은 조용했다. 서로의 삶이 너무 달랐다는 걸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정은 단호했다. 그날, 법원 앞에서 혜진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훈은 그녀의 옆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혜진은 연락처 목록을 열고, ‘지훈’이라는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차단 설정’을 눌렀다. 그녀는 화면을 지훈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앞으로 당신 번호는 차단할게.”
"......"
“내가 나약해져서, 우리 아기가 보고 싶어 져서..., 당신에게 연락하고 싶은 날이 와도 차단되어 있는 당신의 번호를 보면서 결의를 다질까 해.”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해해 줄 수 있지?”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보고, 돌아서 걸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이상할 만큼 단단해 보였다. 그 후로 15년. 지훈은 딸과 함께 살아왔다. 처음엔 서툴렀다. 아이의 머리를 묶는 법도 몰랐고, 급식 신청서를 제때 내는 것도 잊곤 했다. 하지만 그는 배웠다.
딸이 자라면서, 그녀의 말과 행동 속에서 혜진을 계속 발견했다.
“아빠, 나 이거 해보고 싶어.”
“왜?”
“그냥…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말에 지훈은 웃었다. 혜진도 그랬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이유보다 가능성을 먼저 말하던 사람.
가을이 깊어질수록, 지훈은 자주 과거를 떠올렸다. 혜진은 늘 특별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평범함을 두려워했다. 지훈은 그런 그녀를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두고 싶어 했다.
'나는 가장이 되고 싶었구나... 그녀는 동반자가 되고 싶었을 텐데...'
그는 그 차이를 너무 늦게 알았다.
딸은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다.
지훈은 그녀의 발표회에 참석했다. 딸은 친구들과 함께 ‘어른들이 우리에게 빌려간 환경을 되찾아오려는 청소년 연대’라는 주제로 발표를 준비했다. 그녀는 단상에 올라,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꿀 것입니다. 미래는 우리들의 것입니다.”
지훈은 그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 그건 혜진의 말이었다. 그녀가 시위 현장에서, 법정에서, 그리고 그 골목에서 수없이 외치던 말.
그날 밤, 지훈은 오래된 노트북을 열었다. 혜진과 함께 살던 시절, 그가 썼던 글들이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 ‘기억은 저항이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는 그 문장을 첫 소설의 첫 문장으로 썼고, 이제는 그의 이름을 대표하는 문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 그 문장은 혜진의 삶에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기억했고, 저항했고, 사랑했다.
가을의 끝자락, 지훈은 딸과 함께 공원을 걸었다. 낙엽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빠,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
지훈은 잠시 멈췄다. 딸의 눈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던 사람이었어.”
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그날 밤, 지훈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혜진의 번호는 여전히 저장되어 있었다. 여전히 혜진의 단말기에는 차단 표시가 떠 있겠지? 그는 그 번호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화면을 껐다. 그녀는 떠났고, 그는 남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은 그렇게, 모든 것을 덜어내고 남은 것만을 보여주는 계절이었다. 그리고 지훈은 그녀를 이해하게 된 계절을 조용히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