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랑의 사계절 (제6화 :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
가을이 오면,
사람들은 옷을 껴입기 시작한다. 멋을 내기 위해 새 옷을 사서 껴입기도 하고, 더위에 밖으로 드러내던 것들을 추스르기 위해 껴입기도 한다. 하지만 혜진은 오히려 덜어내는 계절이라 생각했다. 덜어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녀는 오래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지훈과 함께 살던 시절, 냉장고에 붙어 있던 메모들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이 간식은 채워놨어요.', '에어컨 필터 교체했어요.', 그리고 '이혼 서류, 다시 확인해 주세요.' 그 메모들을 찢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한 채 그녀는 15년을 살아왔다.
그 사이 아이는 자랐고, 그녀는 늙었다. 지훈이 작가로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독일에서의 수상 소식도 들려왔다. 그녀는 여전히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서로의 삶은 교차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그의 이름이 기사에 뜨면 그녀는 그날 하루 종일 말이 없었다.
“엄마, 오늘은 왜 밥 안 먹어?”
“그냥... 가을이라 그래.”
그녀는 아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가을은 이유 없이 슬픈 계절이었다.
혜진은 재혼했다. 같이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건사해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아니 삶을 함께 견딜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그는 조용했고, 따뜻했고, 무엇보다 그녀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들과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딸과는 다른 결이었다. 그녀가 느끼기에 딸은 지훈을 닮았고, 아들은 그녀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자식은 대체되지 않았다. 딸에 대한 그리움은 아들의 웃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어느 날, 혜진은 아들과 함께 공원을 걸었다. 낙엽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빠가 세상을 뜬 후, 부쩍 철이 든 아들은 제법 혜진의 말상대가 되었다. 아들은 낙엽을 밟으며 말했다.
“엄마, 이거 소리 되게 좋아.”
혜진은 웃었다. 그 소리는 그녀에게도 익숙했다. 지훈과 함께 걷던 캠퍼스의 낙엽길, 딸과 함께 뛰놀던 어린이집 앞마당, 그리고 혼자 걷던 시위 현장의 골목. 그 소리는 오래된 기억의 바닥을 조용히 긁었다.
그날 밤, 혜진은 오래된 폴라로이드 사진을 꺼냈다. 지훈이 그냥 보이는 대로 찍으면 된다며 그녀에게 주었던 사진기로 찍은,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확인시켜 줬던, 오래된 책상 서랍 속에서 메모와 함께 간직되어 온 사진이다. 그녀는 마구잡이로 찍어서 저장하는 요즘 사진은 싫어했다. 기억은 기록보다 강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폴라로이드 사진을 더 처분할 수 없었다.
사진 속의 지훈은 단정한 셔츠에 회색 스웨터를 걸쳤지만, 셔츠의 두 번째 단추는 풀려있었다. 그 시절 그녀는 그게 좋았다. 틀에 갇히지 않은 듯한 태도, 정확히 맞춰진 말보다는 살짝 비껴간 말투. 그녀의 기억 속 지훈은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기록 속의 그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는 왜 그렇게 그의 셔츠가 싫었을까. 왜 그렇게 단정한 그가 자신을 불편하게 했을까. 아마도, 그녀가 단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혜진은 사소한 것에도 예민했다. 그가 넥타이를 매는 방식, 그가 식탁에서 말하는 톤, 그가 아이에게 읽어주는 책의 선택까지.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옥죄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는 그녀를 보호하려 했고, 가정을 지키려 했다. 그러기 위해 갑옷을 둘렀을 뿐이고, 울타리를 쳤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보호받고 싶지 않았다. 갑옷이 답답했고, 울타리를 넘고 싶었다. 그 차이를 너무 늦게 알았다.
가을의 끝자락, 혜진은 아들과 함께 낙엽을 주웠다. 아들은 빨간 잎을 들고 말했다.
“이건 엄마 같고, 이건 나 같아.”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건 딸이 했던 말이었다.
아주 오래전, 지훈과 함께 살던 시절. 그녀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은 저항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기억이 사랑이 되었다. 그날 밤, 혜진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훈의 번호는 여전히 저장되어 있었다. 차단 표시가 떠 있었고, 그녀는 그 번호를 바라보다가 차단을 풀고 화면을 껐다. 이젠 아무 상관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헤어졌고, 각자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은 그렇게, 모든 것을 덜어내고 남은 것만을 보여주는 계절이었다. 그리고 혜진은 낙엽이 지는 속도로 지훈을 떠나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