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의 길을 걷지만, 같은 계절을 지나고 있다.

우리 사랑의 사계절 (제7화 : 겨울, 다시 마주한 계절의 끝)

by 철없는박영감
겨울이었다.


지훈은 베를린의 한 서점에서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있었다. 『기억은 저항이다』라는 그의 첫 소설이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독일에서도 역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0년 만에 새롭게 출간되는 그의 새 책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이번 소설은 그가 지난 10년간 써온 모든 문장의 정점이다.' 그런 극찬이 쏟아졌지만, 지훈은 그 문장들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문장은 항상 ‘기억은 저항이다’에서 시작됐다. 그 문장은 이제 그의 이름을 대표하는 문장이 되었고, 그는 그 문장을 쓸 때마다 혜진을 떠올렸다.


혜진은 여전히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활동 무대가 수요집회로 옮겨졌을 뿐이다. 그녀는 이제는 싸우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예전처럼 목소리를 높이기보다는, 존재로 증명하고 싶었다.


“말보다, 내가 거기 있다는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녀는 그 아이에게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 반드시 소리여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조금씩 가르치고 있었다.


지훈은 출판기념회가 끝난 후, 혼자 베를린 거리를 걸었다. 겨울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는 그 바람이 싫지 않았다. 그는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그가 처음 베를린에 왔을 때 우연히 발견한 장소였다. 주요 관광지에서 살짝 떨어져 있어 차분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는 그 앞에서 오래 서 있었고, 그날 이후로 그곳은 그의 마음속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독일에서의 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던 그날도, 그는 그곳을 찾았다. 예전엔 혼자였지만 이젠 출판사 관계자들과 번역가 등. 많은 일행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유명인이라는 아우라를 풍기며 길 건너 작은 카페 창가에 앉아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평화의 소녀상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녀상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낯익은 이국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잠시 후 피켓을 들었다. 그리고 지훈은 두 눈을 의심했다. '어... 어... 한글이다.'


“우리는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반대합니다.”


더 놀랄 일은 그 무리에 혜진이 섞여있었다. 머리가 희고, 전보다 많이 야위었지만 어찌 그녀를 못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녀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전단지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지훈은 얼른 카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지훈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신호등이 더 다가오지 말라는 듯한 경고를 보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그녀는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일행들이 무슨 일이냐며 급하게 따라 나왔다. 그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카페로 돌아왔다. 그는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을 끝까지 지켜낸 사람이었다.


그는 한참 후 조용히 카페를 나와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녀와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고, 기억보다 멀었다. 그는 전단지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 안에는 ‘기억은 저항이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는 웃었다. 그 문장은 이제 그의 책 제목이었고, 그녀의 삶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이해했다. 그들은 헤어졌고, 각자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지훈은 호텔 방에서 오래된 그녀의 번호를 찾았다. 여전히 저장되어 있었다. 그는 그 번호를 바라보다가 화면을 껐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그는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겨울은 그렇게, 모든 것을 덮고 남은 것만을 보여주는 계절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마주한 계절의 끝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지훈은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용기를 내어 다시 화면을 열어 통화를 눌렀다. 곧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 네 번째 신호음이 끝나면 그냥 전화를 끊으리라...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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