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시작했다.

우리 사랑의 사계절 (제1화 : 늦봄)

by 철없는박영감
사랑의 “이상화”와 “스며듦” 사이에서 흔들리는 두 사람의 모습


캠퍼스는 여전히 벚꽃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꽃비 대신 꽃잔이 떨어지고 있었다. 길 위에는 분홍의 흔적들이 짓이겨져 젖은 채 점점 아스팔트와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완연한 봄이었지만, 혜진의 마음속은 조금씩 여름을 준비하듯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 오늘은 그냥 같이 밥 먹자고 했을 뿐인데, 내가 왜 이렇게 떨려?”

지훈을 기다리던 혜진이 혼잣말처럼 웃었다.


동아리방 창문으로 햇살이 기울던 3시. 지훈이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들어섰다. 평소처럼 단정한 셔츠에 회색 스웨터를 걸쳤지만, 셔츠의 두 번째 단추는 역시 열려 있었다. 그녀는 그게 좋았다. 틀에 갇히지 않은 듯한 태도, 정확히 맞춰진 말보다는 살짝 비껴간 말투.


“오늘은 전단지 안 들고 있어요?”

“있어요. 안 꺼냈을 뿐.”

“그럼 오늘은 그냥 혜진 씨 개인 시간?”


그 순간 혜진은 그 말이 이상하게 따뜻하다고 느꼈다. 그녀를 ‘운동하는 사람’도 ‘소리치는 아이’도 '나대는 계집아이'도 아닌, 그냥 혜진으로 불러주는 사람. 조금 당황하면서도, 그 안온한 감정 속으로 기꺼이 빠져들었다.


벤치에 앉아 시간을 흘려보낼 때, 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혜진은 조용히 지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모습은 말없이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했고, 그녀는 그 침묵이 편했다. 지훈과 혜진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다시 카페를 들어가고 그랬지만, 누구도 먼저 들어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얼큰하게 술에 취했다.


“전요…”


"......"


“… 제가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특별해야 해요.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고, 뭔가 남달라야 해요. 기억에 남는… 그런?”


“왜요?”


“글쎄요. 그냥… 그래야 제 감정에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저는 평범한 지금 이 순간도 꽤 의미 있다고 느끼는데...”


그러면서 지훈과 혜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그리고 틈으로 무언가 스며들었다. 사랑은 원래 이렇게 오는 걸까?


그날 밤, 혜진은 지훈의 옆에 누워 오래도록 그 말을 되새겼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항상 뭔가를 증명하고, 다르게 만들려 애썼다. 하지만 지훈은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봐 주었다. 그것이 그녀에겐 낯설고, 이상하게 아프기도 했다.


그 뒤로 캠퍼스는 둘만의 비밀 연애 코스가 되었다. 커피 한 잔, 도서관의 틈새 시간, 캠퍼스 골목, 잔디밭. 감정은 부드럽게 깊어졌고, 혜진은 점점 더 ‘연인’이란 단어를 머리맡에 두게 되었다.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던 친구들에게 들키기 전까지는...,


“진지한 애가 사랑하니까 더 진지하네.”


혜진은 웃었지만, 내심 그런 말이 신경 쓰였다.


어느 날, 지훈이 그녀에게 작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건넸다.

“이거 가지고 다니면서 한 번 찍어봐. 사진 잘 나오는 거야.”

“난 그런 거 잘 못 찍어.”

“그냥 보이는 대로 찍으면 돼. 혜진이 눈으로...”

혜진은 그의 얼굴을 찍었다. 웃는 얼굴, 눈을 감은 얼굴, 무표정한 얼굴. 그 안에서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확인했다.


그러나 봄도 시간이 흐르면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둘은 작은 말다툼을 했다. 혜진은 늘 피켓에 적을 문구를 강하게 쓰는 편이었고, 지훈은 그에 대해 "가끔은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힘이 빠져요. 사람들이 귀 기울이지 않아요.”


감정이 격해진다 싶으면 서로 존댓말을 쓰기로 둘은 약속했었다.

“그렇다고 너무 공격적이면 오히려 외면받아요.”

“난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한테 맞추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바꾸고 싶잖아요. 그럼 전달 방식도 신중해야죠.”


잠시 말이 끊겼다. 둘 사이의 공기가 어색하게 흘렀다. 혜진은 처음으로 ‘지훈과 나’가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체감했다. 그리고 그 다름이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관계를 끝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사랑, 특별할까?’


며칠 후, 둘은 다시 만났지만, 분위기는 이전과 달랐다. 말은 여전히 오갔지만, 감정은 어딘가 엷어졌다. 혜진은 불안해졌다. 지훈이 여전히 좋았지만, 자신이 ‘충분히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녀를 흔들었다.


그녀는 칼럼에서 우연히 읽은 한 구절이 떠올렸다.

사랑의 초기에 상대를 이상화하며 열광에 빠진다. 과도한 도파민 분비로 행복감에 젖어 몽롱함을 겪는 시기가 지나면 사랑은 사소한 곤란으로 권태와 회의를 낳는다.


그 말이 그녀에게 뚜렷하게 다가왔다. 지금의 그 몽롱함은, 기억될지 몰라도, 오래 갈지는 모른다. 그녀는 조용히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훈. 우리가 진짜 사랑하고 있다면… 이 위기를 넘을 수 있을까?’


그리고 며칠 뒤, 둘은 조용한 오후에 다시 만났다. 지훈의 자취방이었다. 커튼 사이로 흘러드는 햇살은 부드럽고, 창가에 놓인 라일락 화분은 제철 꽃을 자랑하듯 피어 있었다. 지훈은 부엌에서 찻잔을 정리했고, 혜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장면이었다. 처음엔 지금 같은 따뜻함이 너무 좋아서,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혜진은 다시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무던했고, 과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혜진의 상처에 잔잔히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그 평온함이, 그녀의 어지러운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심는 것 같았다. 혜진은 누가 뭐래도 이 남자를 여전히 열렬히 사랑해마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혜진은 아직 꿈에서 깰 생각이 없었다.
이전 01화벚꽃 아래에서, 너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