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아래에서, 너를 만나다.

우리 사랑의 사계절 (프롤로그 : 봄)

by 철없는박영감
벚꽃 흩날리는 캠퍼스, 혜진의 당찬 목소리, 지훈의 조용한 눈빛이 교차하는 그 첫 순간


벚꽃이 캔버스처럼 캠퍼스를 뒤덮고 있었다. 하늘에서 흩날린 꽃잎들이 바람 따라 돌고 도는 그 길 위에 혜진은 서 있었다. 마이크 없이, 대자보 하나 없이, 그녀는 목소리만으로 무리를 뚫고 있었다.


"등록금 인상, 반대합니다. 대학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해요."


지나가던 학생들은 시끄럽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못 본 체 고개를 돌리거나, 혹은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관심 없다는 듯이 스마트폰을 쥔 손을 향해 땅만 쳐다보며 걸어갔다. 어떤 이들은 아예 적극적으로 웃음으로 혜진을 날려버렸다. 그들에겐 그녀가 너무나 ‘진지한 아이’였다. 분위기를 모르는 아이. 피해야 할 아이.


하지만 혜진은 멈추지 않았다. 손에는 손수 만든 전단지, 가방엔 접은 피켓과 함께 얇은 자료집이 들어 있었다. 늘 혼자였다. 동아리에서조차 ‘나대는 계집아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형제도, 친척도, 다들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아버지 닮았네’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었고, 혜진의 어릴 적 기억 속엔 고함과 집어던진 술병, 그리고 식탁 밑에서 웅크리던 자신만 있었다.


혜진을 버티게 해 준 것은 세계를 무대로 특별한 사람이 되어 남자들을 호령하며 당차게 살아가는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혜진은 늘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특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혼자 싸우는 거, 불편하지 않으세요?”


어디선가 조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혜진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가 있었다.


회색 니트에 흰 셔츠, 단정한 옷차림이지만 느슨하게 열어둔 버튼과 손에 들린 커피잔이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 보였다. 무엇보다, 눈빛이... 이상했다. 싸움을 걸려는 것도 아니고, 관심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저 있는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편한 건 제가 아니라 그쪽들이죠.”


혜진이 툭 쏘아냈다.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너무 많은 시간 동안 그렇게 말해왔다. 정중함보다는 단단함이 자신을 지키는 무기였다.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불편한 그들 사이에서 이렇게 선명한 사람을 보니까... 그게 좀 궁금해졌어요.”


그는 전단지를 한 장 받았다. 폰으로 사진을 찍는 대신, 종이를 손에 쥐고 한 줄 한 줄 읽었다.


‘공정은 선택이 아니라 기본입니다.’

‘침묵은 권력을 연장시킵니다.’

‘내버려 두지 마세요, 말해주세요.’


“이 문장들, 직접 쓰셨어요?”

“네. 누구 시킨 건 아니에요. 시켜도 안 해요.”


그는 다시 웃었다. 살짝 비뚤게 웃는 입꼬리였는데, 그 순간 혜진은 문득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이 사람, 내가 무서워하지 않겠다.


“혹시 이름 물어봐도 돼요?”

“지훈.”

“전 혜진.”


그날, 그들은 처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벚꽃은 더욱 짙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 뒤로 걸어간 거리, 벤치에 앉아 나눈 이야기, 공공의 가치에 대한 논쟁, 혜진의 피켓이 구겨졌던 그 골목까지… 모든 것이 서로의 첫 페이지에 쓰이기 시작했다. 지훈은 혜진에게서 불편함보다는 선명함을 보았다. 혜진은 지훈에게서 안온함보다는 예기치 못한 시선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 사람, 오래갈지도 몰라… 자꾸만 기억될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