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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I hate 세종대왕(#2) : 공자와 맹자

한국 권위주의 문화의 현상과 뿌리를 이해하고 변혁을 시도하기 위하여

by 파포

한국은 권위주의 사회인가?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물론 한국사회는 변화하고 있다. 회사에서도 직급파괴가 이루어지고 있고, 직급 서열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Speak up 제도들이 도입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의식의 기저에는 ‘앞에 있는 상대방과 나 둘 중에서 누가 높은가?’라는 사고가 깔려 있으며, 같은 학년, 같은 학번이나 입사 동기가 아니라면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권위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유지되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우선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방향성을 알 수 있고, 방향성을 알아야지 방향을 조정할 수 있다. 징검다리(stepping stone)와 같다. 우리는 과거를 뒤돌아 보아야만(looking backward), 과거와 현재를 실선으로 연결하여 방향을 알 수 있고, 현재와 미래를 점선으로 연결하여 앞을 내다볼 수가 있다(looking forward).


“Man make history, but they do not alway make it as they please.”

마르크스가 한 말로 인간이 역사를 창조하는 주체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지만, 또한 거기에는 구조적인 한계도 있음을 표현한 말이다. 잠깐 세종대왕을 위하여 변론하자면, 한국사회의 권위적인 측면이 모두 언어만의 문제는 아니며, 또한 당시의 구조적 상황 속에서 세종대왕도 한글이 불평등한 언어가 되도록 하는 시대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권위주의 문화의 구조를 종합하자면 어떤 모습일까? 나는 사상(유교), 역사(조선왕조, 일제통치, 한국전쟁, 군사정권), 언어(호칭, 높임말/낮춘말)에서 종합적으로 뿌리를 두고 형성되고 유지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01. 사상(유교)


한국은 공자, 맹자의 나라이다. 물론 공자, 맹자는 중국의 철학가이며, 대부분의 중국인들도 공자, 맹자를 존경한다. 다만, 그들의 영향력은 한국에 더 깊이, 더 오래 미치고 있다. 중국은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도입하며, 권위주의적인 유교사상이 순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자와 맹자 : (질문) 공자와 맹자는 대화 중 존대말을 썼을까? (답변) 맹자는 공자가 죽은 후 100년 이후에나 태어난 인물이다.

유교사상의 핵심 중 하나는 ’ 유별(有别)‘이다. 있을 유! 다를 별! 유별이란 즉, 너와 내가 다르다는 말이다.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오륜(五伦)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이며, 오륜 중에서 붕우유신을 제외한 4개의 인간관계에서 ‘유별’이 드러난다.


군신유의는 민주주의 혁명을 겪으며 해제되었고, 부부유별은 지속적인 교육과 제도개혁을 통하여 여성의 권리가 향상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부자유친과 붕우유신은 시대와 나라를 뛰어넘어 지속 유지되어야 할 가치라도 생각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장유유서이다. 장유유서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보편적인 가치인가? 그에 따른 부작용은 없는가? 어른에 대한 공경과 예절은 필요하겠으나, 한국사회에서 장유유서가 가지는 힘은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장유유서는 군신유의, 부부유별과는 달리 아직도 확고부동한 가치로 한국사회에서 자리 잡고 있지만, 변화가 필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식의 발달 속도가 빠르지 않은 과거에는 어른들의 경륜이 대부분 옳았으나, 요즘의 시대에서 꼰대들의 경험은 Outdated 되어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장유유서의 가장 큰 문제는, 원활한 교류를 차단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Shy 하다. 왜 그럴까?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세우지 못하는 문화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모나면 정 맞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라는 집단의사를 더욱 중요시하고, 개인은 집단의사에 순응하는 문화적 측면도 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수직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윗사람의 말을 따르는 문화에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윗사람은 말하고 아랫사람은 듣는다. 우리는 그렇게 자라왔다. 그러다 보니, 자유로운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토론을 떠나 상급자와의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 한국인은 외롭다. 그 외로움은 친밀한 친구기 되기 위한 조건이 사회적으로 상당히 제약되기 때문이다.


국가별 문화차이에 대한 큰 그림을 보여주는 culture map

인시아드(INSEAD) 교수인 Erin Meyer는 그녀의 저서 <The Culture map>에서 독일인의 토론 문화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다. 독일인들은 어떤 의견에 대해 무조건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이는 헤겔의 정(正), 반(反), 합(合) 원리에 따른 사회의 발전원리와도 뿌리를 같이하며, 반대 의견을 제시하여 보다 나은 방안을 찾아가는 독일문화의 특성이라고 한다. 독일인들은 어려서부터 이렇게 자란다고 한다. 독일에서 회의 시간에 침묵을 지킨다면, 오히려 같이 회의하는 상대방의 시간을 낭비하고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회의에서 아무리 격렬하게 의견충돌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회의를 마치고 나면 사적인 영역에서는 친밀한 우정관계로 쉽게 되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다시 유교로 돌아와서, 공자와 맹자로 대변되는 유교 사상이 당시 신분사회에 기반한 사회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사상으로서 ‘장유유서’와 같은 권위주의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보다 더욱 권위주의 속성을 가지도록 변질되었다.


공자와 맹자는 제자들과 자유로운 대화를 하며, 사상을 발전시켰다.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가 등장하며 수많은 학파와 학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을 펼치며 토론하였다. 오늘날 공자와 맹자의 후손들은 여전히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서 실용적인 아이디어들을 내놓으며 빠르게 경제가 발전하고 있다. 내가 경험한 중국인들은 결국 링다오(领导, 리더)의 뜻에 따르는 것에서는 한국인과 유시하지만, 토론 과정 중에 어렵지 않게 리더와 다른 개인의 생각을 표현한다. 또한 업무의 영역을 벗어나서는 리더와도 쉽게 친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针对事,不是针对人” 중국인들이 의견충돌이 있을 때 자주 하는 말이다. 나의 문제제기는 ‘일(事)’에 대한 것이지, ’사람(人)‘에 대한 것이 아니다. 중국인들은 실용적으로 할 말을 하면서도 일과 사람, 공과 사를 나누어서 의견충돌로 인해 관계가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관계(특히, 서열관계)를 더 중시하여 아랫사람(?)은 감히 윗사람에게 할 말을 하지 못한다. 나의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윗사람의 의견과 충돌한다면 머릿속에 있는 나의 생각은 입으로 표출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익명성이 보장되는 댓글에서는 그동안 무수히 눌려왔던 불만과 분노가 욕설로 표출된다. 한국의 ‘댓글문화’는 매우 부끄럽다. 익명성이 보장되면(계급장을 떼고 나면), 그동안 겉으로 지켜오던 예의의 반대급부로 욕설이 튀어나온다. 마치 눌렸던 용수철이 탄성을 가지고 튀어 오르듯이… 따라서 한국의 신문기사에는 사회를 위한 건전한 시민의 의견이 아닌, 불평과 불만의 댓글만이 가득하고, 기업용 소통 App인 ‘Blind’와 회사별 소통 App에는 내가 속한 회사를 위한 진지한 고민과 제안은 찾아보기 힘들다.


공자와 맹자의 조국 중국에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수평적인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수평적인 토론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왕조부터 이어져 온 유교사상이 막중한 영향력을 미친 것은 맞지만, 유교사상 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역사와 언어를 통한 접근이 추가되어야 하며, 이는 다음 글에서 다루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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