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간의 행복은 자유가 아닌 의무의 수용에 있다."

반드시, 예술을 하게 된다.

by 작가

<야간 비행>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은 지 1년 가까이 되어가는 고전이지만, 새로운 느낌을 또 한 번 얻고자 책을 펼쳤다. 곧바로 이전에는 포착하지 못했던 구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행복은 자유가 아니라 의무의 수용에 있다."




과연 진짜일까? 내 행복이 자유가 아니라 의무의 수용에서 비롯된다고?

이 구절을 납득하기 위해선, 자유와 의무가 무엇인지 자세히 뜯어보아야 한다.

자유와 의무 모두 '추상어'다. 직접 보거나 형태가 없는, 함의를 가지는 그런 단어.

각각 어떤 함의를 지니는가.


우선 자유는, 스스로 자에 말미암을 유를 사용한다. 자유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 있는가?

그렇다.

자유는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있고, 어려운 것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문명 속 그 어떤 사상도 자유를 명확히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기에 자유이고, 그렇기에 어려운 것이다. 자유가 명확했다면 인간의 발전에 큰 제약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운 존재라고 명명했다. 너무도 거대하고 강력한 사르트르의 주장이지만, 난 이에 반대한다. 어째서 인간이 자유로운가? 우선, 태어난 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인간은 분명한 외압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물리적인 힘, 정신적인 힘, 두 개 모두 자유로운 주체로 작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몸 하나 제대로 뒤집지 못하는데, 자유로운가?


다음, 어느 정도의 힘이 생겼다. 그럼에도 자유로울 수 없다.

너무도 간단한 이유이기 때문에, 한 줄로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언제나 환경에 구속당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확실한 자아의 형성 뒤 이를 인식할 수 있어야만 주체적인 활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아의 형성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하는지 우리는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기억이라는 그 불확실한 휘발성 강력한 정보로 인해, 인간 본인이 자아 형성의 경계를 나누기엔 판단 오류의 위험이 크다. 당장 초등학생 시절부터 분명한 자아가 있었을 수 있지만, 나로서는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의 내가 거의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자아의 인식은 스스로에 대한 주관적 위치에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할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유체 이탈이 가능한 것이 아닌 이상, 주관적 위치는 벗어나기 힘들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의 뇌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관적 위치에서 가능한 객관적 인식은 하기 나름이다.


도대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사회의 구속에서 어떻게 벗어나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저 멀리 달에 가서 혼자 살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지 않다.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지만, 자유를 향해,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정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

어쩌면 그 의미가 행복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난 이 사회와 환경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고 굴종하고 싶지가 않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모든 걸 벗어던져버리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용기가 부족하다.


인간의 행복이 자유에 있지 않다는 것은 밝혀졌다. 비록 자유로 향하는 과정 속에서는 행복이 있을 수 있어도, 자유 그 자체에 도달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며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의무의 수용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가?

의무는 흔히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을 지칭하는데, 이 의무를 의식적으로 규정해 볼 필요성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내게 의무는 '하기 싫지만 해야 되는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절대 그렇게 정의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이 내게 의무였으면 한다. 이를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날 둘러싼 그 억압과 강제, 그리고 안전한 울타리마저 깡그리 버릴 용기. 어쩌면 현실을 위한 방책과 노력은 내게 언제나 하기 싫은 의무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이상의 실패를 대비하여 현실의 대안까지도 노력하여 준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내게 "이상의 실패를 왜 가정해?"와 같은 반문이나 내 신념이 틀렸다고 지적해주지 않았다.


정말로, 굴종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최대한 배제하려 악착같이 살아야만 한다.

인간의 행복이 자유가 아니라 의무의 수용에 있다는 저 말은 아마 과도한 여유가 주는 효능감의 결여의 관점에서 서술한 말일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의무는 하기 싫은 것이어야, 자유로 작용할 가능성이 없어지며 수용의 관점에서 인식되고 행복으로 전환가능한 것이다. 하고 싶은 의무.. 라면 결국에 자유로 작용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보수적으로 생각할 수 있음에도 내가 이상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이상이 마냥 하고 싶은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의 글에서도 밝혔지만, 글쓰기는 내게 그 자체로 쾌락을 가져다주고 즐겁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를 하면서 단 한 번도 행복하다는 그 자체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더 글쓰기를 해야 된다고 다짐하는 것일 수 있다. 나의 일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해서 글쓰기를 계속하는 것이 아닌,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까.

하지만 글쓰기를 하기 싫은 것이 아니고, 잘되지 않을 때면 고민도 하고 두렵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더 나를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컴퓨터공학과에서 무언갈 성취하길 원하시기에, 나와 분명한 간극이 있다.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부모님을. 적어도 아직까지는 내게도 충분한 용기가 없어서, 이를 증명과 성공이라는 행위로 채운 뒤 자연스레 설득이 되게 하고 싶다. 하지만 언제까지 증명과 성공을 기다릴 것인가. 어쩌면 용기가 선행되어야 증명과 성공이 후행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요즘 들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전위적이고 급진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교수님이 해주신 말이다.

게오르크 루카치라는 사람은 말했다.







"현실에 굴종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술을 하게 된다.







나의 열정을 다한 세미나 발표가 끝난 뒤 말씀해 주신 것이라, 내가 들으라고 이런 말을 의도적으로 하신 것인가 싶었다. 단연코 최근 있었던 일 중 가장 소름 돋았기 때문이다.


반드시, 하리라.





keyword
이전 14화날은 흐리고 나는 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