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솔직하게 담아낸 나의 글
정말 나답지 않게, 정확히 하자면 요즘의 나와 달리, 오랜만에 자리에 앉아 하나의 글을 써서 마친다는 각오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도서관 내부라서 휘갈기듯 타자를 칠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 정갈하고 꼼꼼하게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제대로 마음을 먹어 글을 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는 내가 요즈음 편안하다고는 볼 수 없는 생활을 지속하고 있어서, 두 번째로는 오늘 어머니와 장시간 동안 메시지를 주고받아서, 세 번째로는 개인적인 욕망이 나날이 커져서, 네 번째로는 오늘 비가 와서 그렇다. 우선은 요즈음 편안하지 않다.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일기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 기분 좋게 마무리한 적이 드물다. 마무리가 좋지 않은 하루는 편안할 수 없다. 왜 마무리가 좋지 못할까? 세밀하게 들어가자면 내가 바라는 만큼의 공부가 진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공학과로 전과하기 이전부터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싸움이 힘들다기보다는 싸움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아서 의욕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별 다른 힘듦 조차 없지만, 내가 느끼는 편치 않음은 이 힘듦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쉬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어느 정도의 고됨이 있다. 생활 속 그 고됨이 없을 때, 나는 나로 살아갈 수가 없다고 느낀다. 끝없이 불편하고 스스로 계속해서 이 정도는 힘들어야 한다고 그 기준에 도달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현 상황, 우선은 중간고사까지 마쳤다. 당연히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 난이도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았고, 그로 인해 접근하고자 하는 마음도 식었다. 그래서 나는 덜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힘들고, 힘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지 못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편치 않았다. 의욕을 다시 불태워 공부를 하면 금세 해결 될 문제지만, 어렵다. 막상 이렇게 쓰고 보니 너무 부끄럽다. 오로지 나 자신의 그 버티는 힘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문제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것이 우습다. 공부는 해야 되는데 못해서 하기는 싫고 근데 해야 돼서 짜증 나고. 이 한 문장에 불과한데 말이다.
부끄럽지만 그래서 요즘 힘들다. 하지만, 부모님께 말하지는 않는다. 원체 나는 누군가에게 현 상황의 고난을 자세히 털어놓는 편이 아니다. 의지하기 싫고, 왜 의지해야 되나 싶다. 가족끼리는 슬픔을 나누어 감하고, 기쁨을 나누어 더한다고 한다. 하지만 난 슬픔을 구태여 나눌 필요가 있나 싶다. 1의 슬픔을 나누면 0.6과 0.6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나 혼자 1의 슬픔을 안고 간다. 어머니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갈수록 내가 개인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이다. 어머니가 이기적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은 조금 다르다. 내가 점차 개인적으로 변하는 데에는 어머니와의 의견차이, 굳어져가는 나의 사상 탓이 있다.
우선 어머니는, 나의 현실 입장에 서계신다. 현실이라 함은, 내가 컴퓨터공학과 학생으로서 열심히 수학하고 군대에서도 학과 관련, 취업 관련 능력을 착실히 쌓은 뒤 복학하여 학부 연구생을 하고 대학원으로 가거나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하는. 그런 지극히 현실적인 입장. 어머니는 내게 그것을 우선적으로 바라신다. 나로서도 그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다. 십분 이해하기 때문에 구태여 문예창작학과가 아닌 컴퓨터공학과로 과를 옮긴 것이다. 반면 나의 경우 이상 입장에 서있다. 아버지는 둘 중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 두 개의 길 위에서 관조하고 계신다.
나의 이상은 올해 2학기 문예창작학과를 복수 전공하여 본격적인 꿈에 대한 준비를 하고, 군대에 가서도 다상 다독 다작으로 미감을 넓히고 생각관을 넓히고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길러나간다. 군대에 다녀온 뒤에는 세계여행을 떠나고, 그즈음해서 나의 작품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그리고 본격적인 나의 꿈을 살아가기 위해 휴학을 하거나 대학 중퇴를 한다. 또는 문예창작학과의 과목만 최선을 다해 수학한다. 그 뒤, 창작의 삶을 살아간다. 한눈에 봐도 현실과 이상의 차이가 많이 크다. 물론 어머니도 그리 꽉 막히신 분이 아니라서, 나의 이상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신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이상이 현실적인 부분을 너무나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꼬집으실 뿐이다. 그럴 때마다 난 이상은 언제나 현실과 어느 정도는 동떨어져있기 때문에 이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현실과 이상 모두 그 이상적인 계획을 온전히 수행하기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항상 이상의 성공이 현실의 성공보다 확률이 낮은 것은 전혀 상관없다는 주장을 한다. 결국 모두 5대 5이기 때문이다. 성공하냐, 마느냐. 둘 중에 하나다. 하지만 어머니가 굳건하게 현실의 입장에서 균형을 맞추어 주심에 감사하기도 하다. 내게 좀 더 안정성을 더해주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어머니와 언제나 첨예하게 대립한다. 다투는 것이 아니고, 대립이다. 난 내 이상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이 필히 동반되어야, 이상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더욱 악착같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변해가는 두 번째 이유, 나의 사상. 결국은 삶은 혼자라는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처음으로 가정에서 떨어져 지낼 때부터 꾸준히 느껴왔던 것이다. 인생은 지독하게도 혼자다. 물론, 평생 함께할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 나도 인지하고 있지만, 결국에 내 삶은 내가 살아가고 끝내도 내가 끝내며 이루더라도 내가 이루고, 쓰러지더라도 내가 쓰러진다. 이러한 삶에서 삶은 함께라는 생각을 잘못하였다가는, 같이 넘어질까 봐 두렵고 과하게 의존하게 될까 봐 두렵다. 이후에 내 배우자가 나타난다면 달라질 사상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약 4년 동안 변함이 없다.
이렇게 살면 외롭지 않으냐고 어머니가 물어보셨다. 외롭지 않다. 외로워도, 해소할 구멍이 있다. 그게 나에게 예술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술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예술가라는 꿈은 내게 유일의 도피처이자 자유로운 공간이며 내가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유토피아다. 예술병이라고들 많이 한다. 흔히 예술이라는 두 글자에 과도한 품격과 진입장벽을 설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단어 같은데,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다. 예술병이라면 병이다. 인간은 어차피 모두가 아프고 병들어있다. 여기서 병이라는 글자를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병은 누군가의 이뤄지지 않은 욕망이라고도 볼 수 있고, 개인의 타고난 기질, 특성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어나는 순간 병자로 살아갈 운명을 타고난다 인간은.
요즘 들어 이 예술병이 심해짐을 잘 알고 있다. 제발, 비웃지 말아 달라. 예술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예술을 대단한 것이라 본다면, 잘못됐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삶부터 예술이다. 어딘가에서 예술가를 내 꿈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지만, 그 자리에서 예술은 대단한 것이 아니며 이러한 부연설명에 사족까지 덧붙이고 싶지 않아서 작가로 그 이름을 바꾸어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내 꿈은 예술가다. 언제나 노력하고 있다 내 꿈을 위해. 난 그저 멍청하고 생각 없는 대학생이 아니다.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럴 바엔 차라리 콱 죽어버리는 것이 백배 낫다. 매일을 내 꿈을 위해 한 발짝씩 노력하고 있으며, 현재로서는 ‘글’이라는 예술의 한 분야에서 정진하고 있을 뿐이다. 그 예시로 19살 때부터, 단 하루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써온 나의 일기장이 있다. 그리고 90개가 넘어가는 브런치 스토리의 글이 있으며, 190개에 달하는 글 작업 폴더의 메모, 작년 10월부터 써온 27개의 블로그 글이 있다. 그렇기에 난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내 이상에 더욱 가까워지고 그 이상을 선명히 해야만 한다.
내 인생이 예술 그 자체였으면 한다. 음악도 연주하고 싶고, 그림도 그리고 싶고, 그 수많은 행동과 작용으로 남들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끝이다. 예술가는 웅변가나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내 목적은 오로지 나는 나의 삶을 예술로서 살아가고, 나의 삶과 약하게든 강하게든 맞닿는 그 누군가의 인생에 스치며 간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부모님께 보내드릴 것인데 아마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말씀드린 적은 없어서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감이 잘 안 온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이는 내가 어떤 변화를 촉구하거나 현재 내 삶에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쓰는 글이 아닌, 오로지 솔직한. 요즘의 이야기를 담기 위함이기 때문에, 오로지 아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다.
마지막 문단에 이르렀다. 솔직한 요즘의 이야기. 난 솔직한 글을 자주 쓰는 편이 아니다. 낯 부끄러우며, 솔직한 글은 다소 부연설명이 많이 포함돼서 임팩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런치스토리를 보고 있으면, 인기 있는 글은 대부분이 솔직한 글이다. 나도 왜 그러한 글들이 인기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으며 공감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확실한 느낀 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21살이고, 사람들에게 공감이 될만한 경험이 부족하고, 아직까지는 솔직한 글을 쓰는 데 익숙지 않아서 그 능력이 부족하며, 솔직한 감정을 풀어내는 것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쓰지 않고, 쓰지 못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력해 보았다. 오늘 비가 와서 그런가 보다.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그런 글을 선호한다. 당장 이 글도 솔직하게 풀어내었다곤 하지만 곳곳에 기존 나의 스타일이 묻어난다. 어떠한가. 난 아직 어려서, 솔직한 글을 쓸 나날들은 차고 넘친다.
어제는 어버이날이었다. 날짜에 맞추어 서울에서 집으로 편지를 부쳤다. 어머니께서 편지를 읽고 피드백을 주셨다. 내 편지에는 나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좀 크다는. 나도 인지하고 있었다. 편지를 쓸 때 주로 나는 내 이야기를 하고, 감사와 사랑의 언어는 20퍼센트 정도로 채운다. 내 솔직한 이야기를 담는 것도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도 있었지만, 지금 놓고 보니 다소 과도한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인해 개인적인 성격이 편지에도 드러난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 동생의 어버이날 편지를 보고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어떤 예술도 마다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의 편지에서는 나의 이야기를 조금 줄여갈 생각이다. 확실히,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 예술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확실한 나의 안식처다. 내일은 컴퓨터공학과 MT가 예정되어 있는데, 학생회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도대체. 그저 나의 책임감과 단체 생활, 그리고 이 작은 경험도 내 예술의 일부이니 기분 좋게 넘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