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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ve Apr 05. 2024

모집요강: 1년 이상의 경력자

공간 디자이너를 직업으로 선택하고 준비를 마치면 구직 사이트에서 내가 원하는 회사를 찾게 된다.

조금만 찾아봐도 입사를 희망하는 회사에서는 대다수가 ‘경력자’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어 싸울 수 있는 1년 이상의 경력자가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경력 없는 ‘신입’은 다수의 지원을 희망하는 조직의 필터링에서 수  없이 걸리 진다.

모집 요강을 모두 읽고 난 후 자신 스스로도 검열하게 된다.

 

씁쓸하게 ‘여기도 안 되겠네?’‘, ’되는 안되든 지원이나 해볼까? 아니다...‘, ‘신입은 대체 어딜 가서 경력을 쌓으란 말이냐...’ 라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어느덧 직업의 첫 발을 내딛는 중요한 순간, 나도 모르게 한 쪽 손은 턱을 괸 채 마우스 스크롤을 지루하다는 듯 드르륵드르륵 긁어 내린다.  


신입 직원의 기본 업무 교육부터 조직에 적응하는 기간을 거쳐 순조롭게 맡은 바 최적의 기량을 낼 수 있도록 장려하기엔 리스크가 존재한다.

연봉은 경력자에 비해 낮지만 즉각적인 직무 효율은 좋지 않고 조직 구조와 시간과 여건상 타당성이 부적합하다고 판단하기에 경력자를 찾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입 즉, 주니어 디자이너들은 필터의 필터를 거쳐, 스크롤을 내리고 내리다 ’ 신입 채용‘  공고에 지원하고 ‘직업’의 성격을 체험하게 된다.


보편적 진리라고 볼 순 없지만 현실임은 틀림없다.


‘나는 앞으로 공간 디자이너로 나의 영혼과 일생을 모두 갈아 넣어서 지구에서 최고인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포부로 이 직업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재미있을 것 같고, 멋진 디자이너가 되고 싶으며, 막연하지만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전공했고,

뭔지 모르게 멋져 보이고, 공간을 꾸미는 게 좋아서, 돈도 필요하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시작한다.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는다.


수많은 경로에서 이 필드로 진입하지만 시작은 거창하지 않고 이렇게 아담하다.

이런 아담한 선택으로 정한 공간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아담하다는 단어가 무색하게도 녹록지 않다.

 

과연 어떤 조직에서 신입 디자이너에 대한 리스크를 떠안으며까지 배려와 존중, 인내와 열정, 활활 타오르는 동기부여를 해 줄 수 있을까?

아주 간혹, 여유를 두고 주니어 디자이너를 키우는 조직도 있고 진정성 있게 인적 자원을 귀하게 여기는 조직도 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소수의 조직일 뿐, 영리와 합리를 우선으로 해야 하므로 그건 번외 사항이다.

   

그렇게 검열을 통해 거르고 걸러 선택으로, 경제적 이유와 조급함을 기초로 한 선택은 직업으로서의 생명력과 지속성에 배치된다.

결국 ‘1년 이상의 경력자’라는 필터에 맞춰진 선택은 매일 벌어지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 내기에 무방비하고 나약할 수밖에 없다.

 

생각했던 것의 몇 배로 내가 초라해진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저문다.

내가 모르는 게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다.

나의 자신감과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

출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퇴근 시간은 불분명하다.

하염없이 작아진다.


글을 쓰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과거 내 이야기이다.


혹시나 누군가는 이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시작을 준비하거나 경험했던 디자이너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의 공간 디자이너로서의 시작도 이렇게 아담(?)하게 시작됐다.

 

어느 조직에 갈지, 얼마를 받을지, 어떤 조건이 더 나은지, 복지는 뭐가 있고, 점심은 주는지, 연/월차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저울질하고,

잘할 수 있을지, 버틸 수 있을지, 못한다고 혼나지는 않을지 등을 근심 걱정만 하다 보면 시작하더라도 쉽게 포기하고 만다.


저울과 걱정, 근심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목표 하나를 성공시키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좋은 공간 아이디어 도출이나 근사한 디자인 보다 성공적인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던 나는

침대부터 정리하라’는 월리엄 맥레이븐(William H. McRaven) 제독의 명언이 큰 동기부여가 되어 지속하고 있다.


허들은 어디에나 있다.

불평등, 불공정도 마찬가지다.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내가 보고 겪는 지금을 조금만 다르게 볼 수 있다면 다를 것 없던 매일매일이 전혀 다르게 시작되고, 전혀 다른 직원관과 가치관이 보인다.


‘1/400조’의 확률로 세상에 태어난 ‘나’라는 존재가 부족한 게 아니다.

단지 내 삶 중에서 ‘직업’으로서의 경험이 아직 없거나 조금 부족한 상태로 숙달되지 않았기에 천천히 훈련하며 쌓아가면 되는 것이다.


작은 공간도, 큰 규모의 공간도, 네임벨류(Name value)가 있건 없건, 경험치는 쌓이고 일 속에서 스스로 재미를 찾고 본질을 잃지 않다면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다.


경력이 없는 나 자신과 1년, 10년 이상의 경력자 사이에는 시간의 경험치와 지속성이 있음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자신에게 격려를 아끼지 말고, 자기 자신을 믿어주자.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니 조금만 나를 기다려주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1년 이상의 단단한 경력자'가 되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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