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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ff J Oct 18. 2024

버스 묵상 35

자유와 노력

누가복음 19장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삭개오는 키가 작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직업은 세무서장 쯤 될 것 같고, 기질을 보자면 우울질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당시 세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돈을 걷어서 로마에 주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돈을 더 많이 걷어서 자기 주머니를 채우기도 했었기 때문에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다고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리들의 장이었던 삭개오는 더욱 더 많은 지탄을 받았었겠죠. 


 이 삭개오가 살던 마을에 예수님께서 들르시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갑니다. 삭개오도 보고 싶어서 거리로 나갔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아마 삭개오가 평소에 친한 친구들이 많았다면 나 보고 싶은데 키가 작아서 안 보이니 내가 앞으로 좀 가면 안 될까 하고 양해를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삭개오는 아예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평소에 친한 친구가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고, 또 그런 말을 할 배짱도 없는 기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삭개오는 결국 나무 위로 올라가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삭개오 앞에서 예수님께서 멈추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지만, 이름을 불러준 사람은 삭개오가 유일합니다. (부자 청년, 우물 가의 여인 등등)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름을 누가 불러줍니까? 내가 부른다기 보다는 남이 불러줍니다. 즉, 남이 불러줌으로써 나에 대한 정체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과 왕래가 적어서 이름을 불릴 수 있는 기회가 적었던 삭개오에게, 자기의 이름이 불렸다는 것, 그것도 예수님께 불리었다는 것은 삭개오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게다가 너희 집에 오늘 머물러야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주변 사람들은 웅성 거립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이라고 여겼던 사람의 집에 머물러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니깐요. 삭개오도 이런 분위기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더욱 기뻤을지도 모릅니다. 집에 사람들을 초대할 기회를 잘 가지지 못했을 텐데, 근원적인 욕구인 외로움을 해결할 기회가 생겼으니깐요.


 결국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돕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갚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삭개오가 아닌 이 집에 구원이 임하였다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상처가 회복되는 것을 통해서 삭개오 뿐만 아니라 삭개오의 주변이 회복될 것을 보셨기 때문에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예화이지만,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시선을 느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삭개오를 나쁜 사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한일전은 꼭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격하게 공감됩니다. 하지만, 예수님 혼자 삭개오 내면의 외로움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아픔을 바라보실 때, 삭개오에게 내면적인 회복이 일어났고, 행동의 변화가 나타났으며, 삭개오 뿐만 아니라 삭개오의 집이 구원받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만 한다면 개개인의 신앙 형태나 습관들에는 꽤 관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장로교든 감리교든 침례교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하나님께서 괜찮다고 하신다면 인간이 거기에 무슨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하나님도 싫어 하실거야 라고 생각하는 거 자체가 잘 못 가고 있는 거죠. 


 하지만, 개개인의 신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해서 자기 맘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서 시험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또 실족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부단히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또한 한 부분에서는 꽤 잘 살고 있을지라도 다른 부분에서는 연약하기 그지없게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지치면 나야 말로 위선자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야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렇게 살아야죠. 그래서 매일매일 사는 게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정갈하게 머리에 기름 바르고 다시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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