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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섭 Apr 26. 2024

산다는 것(?)

존재의 의미

일반인들도  궁금해하는 사항이지만 특히 철학자, 과학자, 종교인들이  숙제처럼 붙잡고 탐구해도  무지개를  잡는 것처럼  애매모호한 것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 합니다.


삶에 대한 정의가  성립하면  이는 곧 `죽음`에 대한 통찰과 같기 때문에  가보지 않은,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곳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요.


다음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아무도 모르므로  추측만 난무하고   신의 존재가  있니 없니 하는 쟁점으로  대두되는 것일 겁니다.


왜 태어났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그 가치를 부여하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누구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마치 우주가  아무 이유 없이 빅뱅으로 시작되는 것과 같이   나만의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어나기 전의 나는 무엇이었을까요?

또한 죽고 나면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아마 우리가 우주의 탄생의 비밀을 모르듯  우리의 출발을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주의 종말은 예측이 되는데  이는 우리의 죽음을 알 수 있는 것과 같겠지요?


이기적인 유전자에서는  인체는 단지 DNA를  후손에 전해주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그 근간이 되는 염색체 속의 DNA는  몇 가지 원자의 구성물에 불과하고 하나하나는  작은 원자들의  집합일 따름인데   무엇이 육체적, 정신적 활동을 주재하게 만들까요?


A.I의  발달은 불과 몇 년 전에 만 하더라도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기 어렵다고 장담하던 과학자들이 무색하게   인간의 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인지와 사고영역에서도  인간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함을  보게 됩니다.


0과 1로  연산되는  무미건조한 컴퓨터의 이진수 조합이  어느  단계를  기점으로 트리거 포인트를 지나면서 기계에서 의인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생명도  단순한 탄소, 산소, 질소, 인, 황 등 몇 가지의  화학적 조합이  지구 탄생 초기에  결합되기 시작하여  똑같은 이유로  의지를 지닌 생명체로  발전되었리라 봅니다.


윤회가 고통이라고 여겨  그 업을 끊고자 하는 것이 불가에서  성불로 여기는데, 산다는 것이  괴롭고 힘들어 고해(苦海)라고 인식하는 바  생명은 왜  고생을  반복하게 하여   삶의 연속성을 유지케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3대 거짓말이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노인이 빨리 죽고 싶다`하는데  이는  노령이나 삶의  고달픔으로  포기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더 오래 살고 싶다는  반어법적인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겠지요?


흐르는 물이  어떤 의도를 띠고 있어 흐르는 것이 아닌 만큼  삶도 내가 원해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산 샘에서 발원하는 물은  계곡과 강을 거쳐 바다에 다다름으로써  가시적 흐름을 완성합니다.

그런 다음  증발하여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느닷없이 구름이라는 유형으로  비를  산자락에  뿌림으로써 새로운 주기가 형성됩니다.


인생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바다를 향해 질주하는  물과 같으며   때로는 맑고  깨끗하게  많은 생물들에서  베풂을  주면서  바다에 도착할 수도 있고, 한편  오염, 흙탕물, 습지 등  탁한 상태로 다다를 수도 있습니다.


운과 노력이 합쳐져서 승승장구하는 인생도, 반대로 힘든 세상을 만나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일생도  사람의 도덕이나 가치관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냉정함이 자연같습니다.


또는  지독한 가뭄으로 미처 바다에 도달하기 전에  증발될 수도 있겠지요.


엔트로피(무질서도)를 증가시키는 쪽으로 진행되는 것이 순리인데  자연은 왜 거기에 역행하는  생명체를 만들고  늙게 하고 분해하고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수레바퀴 같은 순환 주기를 가지게 할까요?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부여받은  생명은  끝날 때까지  원만하고  건강하게  살다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저 같은 의자(醫者)로서는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지식이나마   타인의  바른 생활방식을  권유하고  진정 몸이 원하는 바를  탐구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여  고통이나 고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삶의 한 가치라 봅니다.


프로스트의 길처럼  한 분야로의  선택은  다른 길을 포기하는 수밖엔  없지만  여러  사람들이 각기 지나온 길에  충실하였다면  품앗이하듯이  서로의 보고 들은 것을  나눔으로써  잃어버린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얻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도 각자의 영역에서 귀한 발걸음을 내디뎌 봄이 어떠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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