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증 요법의 위험성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지금은 드물지만 과거에 어른들에게 여쭙는 안부 인사입니다.
삶과 죽음은 종이 뒤집기와 같고 내 몸에 붙어 있는 그림자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단지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 길이고 그 누구도 모르는 초행길이어서 막연한 두려움은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옛 분들뿐만 아니라 집에서 기르던 가축이나 야생동물들도 수명을 다할 때는 하루 이틀 혹은 며칠 식음을 전폐하고 잠을 자듯이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것을 봅니다.
마치 촛불이 여전히 환히 비추다가 어느 순간 후 후룩하고 꺼지듯이 평안하게 하직들 하지요.
하지만 근래 많은 환자들이 수년을 고통 속에서 활동도 못하고 투석, 당뇨합병증, 치매 등으로 고생하여
환자 본인뿐만 아니라 보호자들도 정신적,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중하고 있습니다.
소위 의료가 발달되고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면 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의료혜택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의사들의 파업으로 의료 환경이 뒤숭숭한데 외국(이스라엘, 미국 등)에서도 의사들 파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는 반대로 환자 사망률이 확연히 줄어드는 바람에 장의사들이 생계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3차 의료기관인 대학병원이 수련의 파업으로 벌써 수개월째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만 파업 초기 예상했던 의료 사고 같은 문제가 생각보다 뚜렷이 대두되고 있지 않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고 봅니다.
의학이 발달될수록 꼭 삶의 질이 비례해서 개선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의학 발달은 물론 가치 있습니다. 하지만 의료 기기의 발달이나 진단의 혁신이 수명을 연장하거나 삶의 질을 반드시 개선해 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의료 기술이 뛰어나도 치료 대상은 바로 `나`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배고파 우는 아이를 비유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3자(의사)가 보기에 정상적으로 울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울고 있으니 어떻게든 울음을 막으려 합니다.
입을 막거나 때로는 혼을 내거나 하여 당장은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는 요구사항(배고픔)이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계속 울어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니 무조건 막는 치료를 반복합니다.
이런 치료법을 대증요법이라 하며 임상에서 많은 부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의사가 병의 원인을 스트레스, 체질, 환경 등을 언급하면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가령 혈압, 당뇨, 고지혈을 병원에서 진단받았다고 합시다.
즉 이는 아기가 우는 증상과 같아서 내 몸은 이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는 아기 성대가 잘못되어서 우는 것이 아님에도 왜 우는가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약을 써거나 처치를 해서 울음을 재우는 것을 치료 목적으로 합니다.
같은 이유로 무조건 혈압을 내리고 혈당을 내리는 치료를 하여 환자의 요구사항에는 관심이 없고 보이는 검사 수치를 정상치에 끼워 넣는 치료를 하게 합니다.
다른 병증도 대동 소이 합니다.
염증을 만들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슴에도 만병의 근원은 염증이라는 거짓 명언으로 무조건 염증 수치를 내리는데 몰빵합니다.
현명한 의사는 왜 혈압을 올려야 하는 지? 왜 염증을 만들어야 하는 지? 에 대해 고민을 하고 그 원인을 없앰으로써 저절로 혈압이나 염증이 물러나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의학을 모르면 좋았을텐데...
안타까운 경우를 너무 많이 봅니다.
결국 내 몸이 원하는 바는 무시되고 자정작용을 박탈하여 병이 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 혈압약 하나 처방받아 먹다보면 거짓말처럼 다른 증상이 발생하고 처방약의 종류와 갯수가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증상을 되돌리지 못하게 엄중하게 만들어 버려 수명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몸을 망가뜨려 요양원이나 병원에 입원하여 수년을 보내는 망가진 삶을 사시는 분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지않습니까?
병을 만드는 것도 나이지만 병을 치료 하는 것도 나라는 생각을 잊으면 안됩니다.
누차 언급하지만 가장 좋은 의사는 나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