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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파랑새 Apr 10. 2023

고맙고 감사하다.

모두의 연대로 일궈 온 항의행동

가습기살균제참사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피해자모임은 초기에 온라인 카페 운영진을 중심으로 모였다. 여건이 되는 피해가족들이 항의행동에 참여했다. 직장이 있거나, 몸이 불편해서 활동에 참여하는 데는 언제나 한계가 있었다. 이후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가피모)'으로 이름도 바꾸고 회칙도 마련하는 등 모임의 체계를 갖추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력에는 늘 한계가 있었다. 


2014년 세월호참사 이후 세월호 가족들은 똘똘 뭉쳐 싸웠다. 워낙 충격이 컸던 탓에 이슈의 폭발력이 있었고, 가족들과 시민들이 함께 연대하는 결속력도 컸다. 세월호참사 가족들은 똘똘 뭉쳐 싸우고 있는데, 가습기살균제참사 피해가족들은 왜 눈에 잘 띄지 않을까.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습기살균제참사 피해자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고, 모여도 몇 명만 모여서 외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들은 여건이 되는 대로 항의행동에 나섰다. 거리에서 싸웠다. 국회 앞에서 텐트를 치고 싸웠다. 여의도 옥시 본사 앞에서 싸웠다. 전국을 돌며 호소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외치고 싸웠다. 휠체어를 탄 채 싸웠다. 아픈 몸을 이끌고 병상에서 응원했다. 거동이 어려워 집안에서 응원했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외치고 싸웠다.  


피해 문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상황이 길어지면서 때로는 피해 가족들은 서로를 원망하기도 했다. 4단계로 나눠진 초기 판정등급이 피해자들의 내부 갈등을 부르기도 했다. 대표단(운영진)을 질책하기도 했다. 필요할 때는 십시일반 힘을 보탰다. 피해자대회가 열리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참여했고, 묵묵히 지켜보고 간 이들도 많았다. 궁금한 것,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할 말 많은 피해 가족들에게 양보하고 발길을 돌린 그들을 기억한다. 


피해 가족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이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고 있다. 아픈 몸을 지탱하며 남은 생을 위해 애쓰고 있다. 돌아보니 속수무책 스러져간 이들도 많다. 어쩔 수 없어 체념한 채 살아가는 그들의 가족들이 있다. 지금도 억울함에 피해문제를 호소하며 뛰고 있는 이들도 있다. 알 수 없는 피해자 가족들의 삶과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 수 없다. 그저 안타까움 속에 힘을 내어 살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동안 힘을 보태주고, 자기 자리에서 싸워 준 피해가족들이 감사하다. 내가 너무 부족해 다가서지 못했거나, 다가섰더라도 나의 부족함으로 인한 미안함도 많다. 함께 싸워주고 응원해 준 피해자와 가족들이 고맙고 감사하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시민사회단체들의 노력과 활동에 감사드린다.           


백도명 전 서울대환경보건대학원 교수님은 자타가 인정하는 석학이자 환경보건, 공중보건 분야에서 행동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2015년 영국 항의행동 방문 당시에 백 교수님은 안식년을 맞아 가족들과 외국에서 휴가 중이었는데 항의 방문단에 합류했다. 백 교수님은 환경보건센터 공동대표를 맡고 있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문제 해결 과정에서도 전문가로서 노동자들 편에 서서 활동해 주었다. 가습기살균제참사에서도 약자인 피해자들 편에 서서 의사와 교수로서 전문성을 갖고 싸워 주었다. 


백 교수님의 가세로 영국 현지 항의행동단의 존재감과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백 교수님은 방문단 중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이었다. 전문성과 학식 등 여러 경륜을 갖춘 ‘어른’의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활동 기간 내내 대접을 받는 모습은 한사코 없었다. 모든 일정을 함께 했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라면을 끓여주는 등 일행들을 챙겼다. 항의행동에 솔선수범 참여하였다. 그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늦었지만, 백도명 교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가습기살균제 문제를 공론화하고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활동의 모든 것을 걸었던 장본인이었다. 최 소장의 적극적인 활동이 없었다면, 아마도 가습기살균제 피해 문제는 지금과 같은 궤도에 올라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최 소장은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전문성과 실무력을 피해 대책 활동에 쏟아부었다. 최 소장은 환경단체 등 시민사회단체의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이 문제가 흐지부지 되지 않도록 했다. 순발력 있는 언론 플레이를 조직했다. 


2015년 큰 획을 그었던 영국 항의행동 방문 당시에는 환경보건시민센터 사무실의 이사 비용까지 털어가며 '올인'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운영진들은 최 소장의 결정을 믿고 따라주었다. 최예용 소장과 활동가들, 운영진들에게 감사드린다. 이들은 기댈 곳 없는 피해자와 가족들의 원망도 많이 들었다. 누군가를 대변한다는 활동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아쉽고, 안타깝고, 아팠을 것이다. 어느덧 도래하고 있는 더 좋은 세상, 더 안전한 세상이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2016년 전국 불매운동을 조직했던 가습기살균제 전국네트워크와 참여단체들, 활동가들에게도 감사드린다. 광화문과 여의도를 달궜던 옥시불매운동은 성공적이었다. 가해기업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소비자 안전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이들 단체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해 애를 써준 활동가들에게 감사드린다. 옥시불매 운동에 맘을 써주고 참여해 준 소비자들에게도 감사드린다. 


특히, 고 박원순 시장님에게도 감사드린다. 단체장으로서 가장 먼저 옥시불매 운동을 선언하고 나서주었다. 피해자들과 면담하였고 피해자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피해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주었던 정치인들에게 감사드린다. 

    

2016년 국정조사가 피해문제 해결의 큰 획을 그었다. 국정조사에 참여해서 문제해결에 적극 나서주었던 여야 국정조사 특위 위원분들에게 감사드린다. 특히 어려운 국면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당시 원내대표는 국회 국정조사특위 위원장을 맡아 문제해결의 정면에 나서 주었다. 


국정조사 특위의 여러 활동이 있었지만 2016년 영국 현지 방문 조사 당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다. 국정조사 현장방문단의 현지 일정은 2박 3일로 빠듯한 일정이었다. 도착해서 첫날 자는 것을 빼면 사실상 1박 2일의 일정이었다. 현지 조사단 의원들은 오고 가는 비행기 편도 피해자들과 함께 한다는 차원에서 일반 이코노미석을 이용했다. 


둘째 날부터 시작된 일정은 옥시레킷벤키저 방문을 시작으로 진행되었다. 방문단은 옥시 레킷벤키저 본사 방문을 통해 현지에서 본사 대표의 사과를 받아냈다. 옥시 방문 후, 현지 조사단은 영국 검찰청(중대수사본부)을 방문해 협조를 구했다. 또 다른 정부 기관을 방문하고 외교적 사안으로 다룰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협조를 모색했다. 둘째 날은 하루에 주어진 모든 일과를 수행해야 했기에, 매우 짧은 일정이었다. 


우원식 위원장은 방문단 중 가장 연장자여서 누구보다도 피곤했을 것이고, 현지 일정을 이끄느라 부담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 방문 투쟁(항의행동)에 나선 피해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성의를 보여주었다.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현지에서의 고생을 격려했다. 이어 피해자들과 식사를 마치고서, 동료의원들과 그 외 일행들과 함께 간단한 시간을 보내며 격려하는 시간도 잊지 않았다. 


2015년 영국 현지 항의방문에서 백도명 교수의 든든한 응원과 지지가 힘이었다면, 2016년 영국 현지 방문에서는 우원식 위원장의 든든한 역할이 큰 힘이 되었다. 우원식 위원장은 국회 국정조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해 주었고, 피해구제특별법을 발의해서 통과시키는데 주도적으로 역할을 했다. 가피모의 대표로서, 피해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린다.  


우원식 위원장 외에도 장하나 전 의원, 심상정 의원, 이언주 전 의원 등등 많은 의원들이 피해구제법을 발의하고, 국회 특위를 위해 노력했다. 사회적 참사특별법 통과를 위해서는 박주민 의원이 힘을 썼다. 의원들과 함께 보좌진들도 많은 노력을 해주었다. 애써주신 모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끝으로 딸, 나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가끔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를 그 먼 곳에 데리고 간 것은 잘한 것일까'라고 생각한다. 어렵게 마련된 영국 항의행동이므로, 유의미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단순한 생각이나 판단이 아닌 책임감이나 의무감이었다. 마땅한 적임자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가피모의 대표로서 ‘감수할 것은 감수해야 한다’라는 생각도 있었다. 아이 엄마와 아이의 동의를 구하기는 했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어른들의 결정이었다. 


당시에는 일정을 소화하느라 생각의 겨를도 많이 없었다. 어른들의 일정에 맞춰 아이는 전체 일정을 따랐다. 항의행동단의 일정은 아침 이른 시간부터 저녁 밤에까지 이어지는 일정이 주였다. 아이의 시간이 거의 없는 상황에 대해 뒤늦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아이는 신기했을 수 있다. 반면, 돌아오는 비행기 편에서 아이는 기내식도 마다하고, 지쳐 내내 잠만 잤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빠로서 많이 미안했다. 힘든 일정이었을 텐데, 짜증 한 번 없이 일정을 함께 해 준 내 딸, 나래가 대견하고 감사하다. 


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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