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의 부재

~초등학교 4학년이 지킨 우리 집~

by 나쵸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내 최대 관심사는 키우고 있던 두 마리 햄스터의 안녕이었다. 그때 나는 자타공이 ‘햄스터 박사’로 학교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봤자 같은 학년 아이들 사이에서였지만)

‘햄스터 박사’의 햄스터들이 과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 그 누구도 감시하지 않았지만 왠지 누군가 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 ‘햄스터 박사’라는 명예에 조금의 오점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은 매일같이 햄스터들과 그들이 생활하는 케이지를 살뜰이 챙기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엊그제 갈아준 베딩이 축축하진 않은지, 급수기의 물이 탁해지진 않았는지 확인하는 일은 이른 아침, 눈꼽도 떼기 전에 꼭 행해야하는 중요한 일과였다. 그런데 고작 두 마리 햄스터의 케이지만 관리하면 되었던 만 아홉 살의 내게 한 가정을 맡겨버린 사람이 있었다. 그건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그 당시 교회의 교주, 그러니까 ‘참부모님’으로 일컫는 사람들이 직접 지도하는 40일 간의 수련회에 참가해야한다고 했다. 교회는 수련원에 머무르며 교주의 가르침을 체화하고 원죄를 탕감할 수 있는 귀중한 이 기회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라고 엄마를 설득했다.

그 말을 전하면서 엄마는 내게 두 동생들을 부탁했다. 아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이십 만원되는 돈과 우리 삼남매를 남겨두고 기어코 여수행 버스에 올랐다. 그 때 내가 아홉살, 여동생은 일곱살, 막냇동생이 다섯 살이었다.


엄마가 떠난 날은 평소와 다름없이 등교를 해야했으므로 엄마를 배웅조차 할 수 없었다. 텅빈 집에 돌아와 환하게 웃는 가족사진 속 엄마의 모습을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도 그 때의 눈물이 어떤 눈물이었는지 정의할 수 없다.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든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린 우리 삼남매를 두고 장시간 집을 비우는 게 못내 눈에 밟혔던 엄마는 떠나기 전, 교회 친구들에게 우리의 식사를 부탁했다. 2-3일에 한번씩 낯익은 아줌마와 낯선 아줌마가 번갈아서 반찬을 만들러 찾아왔다.

하지만 한 집안이 몇 가지 반찬만으로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나는 매일 아침 햄스터의 케이지를 살피는 일 외에도 일어나기 싫어 떼를 쓰는 여동생을 깨워 아침을 먹이기, 웃도리를 입지 않겠다고 완고하게 버티는 막내동생을 어르고 달래 유치원 등원차량에 실어다 보내기 등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수많은 역할을 소화해내야 했다.


가끔 막내동생이 온 집안이 떠나가라 울며 유치원 등원을 거부할 때면 나도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고 싶을 때도 있었다. 내 처지가 한스러워서가 아니였다. 등원 버스를 놓치면 아빠에게 전화가 갈테고 그럼 아빠는 엄마를 더욱 원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야간 근무가 잦은 직장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집안일은 커녕 본인의 끼니도 챙길 틈 없이 만사를 밀어넣어 둔 채 안방에서 모로 누워 잠을 자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나았다. 깨어있는 시간에는 “너네 엄마는 여기 다시 못돌아와.” 같은 이야기를 거듭해서 우리에게 했었을 테니까.


어린 우리들이 생각했을 때도 엄마의 죄질은 나빴다. 생떼같은 어린 아이들을 집에 남겨둔 채 40일간의 여수행을 선택했으니까. 하지만 우리 셋 중 그 누구도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가 아빠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삼남매에게는 최대의 공포였다. 오죽하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막냇동생이 “너 이렇게 안일어나면 너 때문에 엄마 못 돌아오는거야.”라는 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아빠가 야간 근무에서 돌아오기 전날 밤에는 내 몸만한 빗자루와 헤진 수건으로 만든 걸레를 들고 여동생과 함께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빨래 바구니가 수북해질 만하면 엄마가 일러준 대로 흰 옷과 색깔 있는 옷을 구분해서 세탁기를 돌렸다.

어쩌다 반찬을 해주는 아주머니들이 오시는 텀이 길어질 때는 네이버 지식인에서 된장찌개 레시피와 고등어 굽는 법 같은 걸 검색해서 음식 흉내를 낸 음식을 만들었다. 밥상 위에 수저까지 완벽하게 세팅을 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아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질 것도 같아서.


엄마없는 40일간 삼남매가 사력을 다해 치열한 팀플레이를 펼치는 동안 엄마에게서는 몇 통의 편지와 전화가 걸려왔다. 그 사이 나는 고무장갑이 내 손에 너무 크다는 이유로 맨손 설거지를 하다 주부습진에 걸렸고 여동생은 같은 반의 친구에게서 머릿니를 옮아왔다. 어느날은 위기탈출 넘버원 ’범죄편‘을 너무 몰입해서 본 남동생이 자기 전 현관문 걸쇠를 거는 바람에 야근을 끝내고 온 아빠가 층계참에서 새벽을 지샌 날도 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한 달 반의 수련을 마친 엄마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부부간의 냉전은 한동안 이어졌지만 일상은 다시 굴러가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없을 거라던 교회의 40일 특별 수련은 이내 교회의 상설 프로그램이 되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건 어렸던 우리들의 40일 뿐이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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