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에세이
우직한 황소처럼
나의 꿈은 국어교사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마음속에 뿌려진 작은 씨앗이었다.
나는 그 꿈을 놓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한 길을 걸었고,
마침내 교단이라는
인생의 첫 무대에 섰다.
중학교 1학년 담임을 맡았다.
시골 학교였고,
그 시절 교사는
막노동꾼 같은 일도 해야 했다.
학생들과 함께 둔덕을 다져 잔디밭을 만들고,
운동장의 풀도 맸다.
도시에서 자라 그런 일에 서툰 교사들은
교무석상에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민주화되지 못한, 거친 야만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순수했고,
교사의 말은
귓바퀴 근처에 머물다 떨어지는 말이 아니라
심장에 박히는 말이 되었다.
그때 들려준 이야기와 가르쳐 준 노래들은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만난 세월의 강을
잘 건널 수 있도록 도와준
작은 나룻배가 되었다고 한다.
그중 담임반이었던
영준이는 유난히 눈에 띄는 아이였다.
열네 살의 나이였지만
말수가 적고 행동이 어른스러웠다.
학급에서 묵직하게 중심을 잡아 주던 아이였다.
잔디밭을 만들 때,
곡괭이로 땅을 파고 흙을 고르는 일을 해야 했는데
어정쩡하게 서 있던 담임을 대신해
영준이와 창현이가 묵묵히 그 일을 해냈다.
나는 두 애를
우리 반의 좌청룡, 우백호라 불렀다.
그 말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웠는지
지금도 영준이는 기분 좋은 날 전화를 할 때면
“선생님의 좌청룡 영준입니다.” 한다.
무거운 짐을 옮길 일이 생겨
두 아이에게 부탁했더니
리어카를 끌고 와
말끔하게 일을 마무리해 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 주었다.
훗날 영준이는
그날 먹은 짜장면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말했다.
영준이는 도시의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박카스 한 병을 들고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 찾아오기도 했다.
이따금 교감선생님 자리에 놓인 전화기로
남도의 투박한 사투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건강하신가요.
저, 이번에 은행에 취직했어요.”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큼직한 꽃바구니가 배달되었다.
내가 퇴직하던 해까지,
거의 스물다섯 해 동안 거르지 않고.
술 한 잔 들어가
기분이 좋아진 날에도,
내 생일 전날쯤 되는 날에도
영준이는 전화를 했다.
“선생님, 저 승진했어요.
이제 전무입니다.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저도 꿈을 이루려고
열심히 살았어요.”
고향을 지키며
은행에서 일했고,
성실함을 인정받아
전무가 되었다고 했다.
“선생님, 한 번 내려오세요.
맛있는 회로 대접할게요.”
“선생님, 학생들과 봉사 활동 지도하는 것
제가 후원하고 싶어요.“
영준이는 여러 번 얘기하지만
“영준아, 네 마음만으로 충분히 힘이 된단다.”라고 말했다.
영준이가 고등학생 시절
박카스를 들고 찾아온 이후로
우리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영준이를 생각하면
말없이 밭을 가는
황소 한 마리가 떠오른다.
누가 보지 않아도
제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등줄기를 가진.
고향을 지키고,
일터를 지키고,
아들 셋인 가정을 지키며,
어린 시절
꿈을 꾸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던
한 교사의 보람까지
조용히 지켜내 주며
우직한 걸음을 떼고 있는 황소 한 마리가….
나는 그 황소의 걸음에서
교사로 살아온 내 시간의 무게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