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넓고 큰 사무실을 가꾸는 제자

교단 에세이

by 정하

가장 넓고 큰 사무실을 가꾸는 제자

― 파란 하늘을 천정으로 삼고-


24살 새내기 교사로 교단에 처음 섰을 때 만난 소녀,

눈빛이 아주 예리하고 이지적으로 생긴 그 학생은

내게 처음으로 수준 높은 내용으로 질문을 했다.

전교 1등을 줄곧 하는 학생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독서와 일기 쓰기를 강조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일기장 점검을 하였다.

사생활 침해라 일기 내용은 보지 않았는데

어느 날 은수의 일기장에 이런 메모가 있었다.

“선생님, 저의 일기는 꼭 봐주세요.”

그 후 일기를 통해 우리는 소통하였다.

15살 소녀의 섬에서 시작된,

따뜻한 감성과 파르스름한 고민과 설렘의 작은 물결이

큰 파도로 일렁이며

나의 섬으로 밀려왔다.


토요일, 수업 마치자마자

동료들과 정류장으로 달려가던 조급한 생활을 청산하게 된 건

교문통에서 기다리던 은수 때문이었다.

은수와 느긋한 걸음으로 내 자취방으로 돌아와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토요일.

그 토요일의 여유로움과 새내기 교사로서 설렘은

내 의식 깊이에 진한 그리움으로 남겨졌다.


세월이 만드는 물줄기는 작은 도랑으로 흘러가다가

다른 도랑과 만나면서

만남을 이어주기도

자연스레 멀어지게도 한다.

바쁘게 흘러가는 세월의 강에서 노를 젓느라

은수와 연락이 끊어졌다.


그러다가 남편과 내가 운영하는 국어 홈페이지가

전국 대상을 받게 되었고 수많은 제자들이 안부를 물으며 찾아왔다.

온라인상에서 뜨거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은수도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그리운 선생님,

가슴이 마구 뜁니다.

보아구렁이를 칠판에 그리시며

저희에게 많은 물음표를 선물하셨죠!

커서도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읽으면

선생님 생각을 했답니다.

선생님을 이렇게 뵈니 온 마음이 설렘으로 가득합니다.

저 기억하시겠어요? 은수예요.

저는 고향 마을에서 하늘빛에 물들어 살아요.

늘 넘치도록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은수는

세상에서 가장 넓고 큰 사무실을 가진 엘리트 파머다.

파란 하늘을 천정으로 삼고,

고향의 넓은 땅을 사무실로 삼아

하루를 떠오르는 동녘의 햇살로 씻고

저무는 석양빛에 물들이며

초록의 들녘을 지키며 살고 있다.


타고난 지성은 농토에서도 빛을 발해

특작물 개발에 성공했고,

지역을 살리는 일로 사람들의 신뢰를 얻으며

고향을 지키고 있다.

방송에도 소개될 만큼의 수많은 성취를 이뤄냈었다.


은수를 닮아 총명한 세 딸의 소식도 내게 기쁨이었다.

자기 삶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는 멋있는 젊은이로 성장하고 있다고 했다.

은수를 생각하면

고향의 땅을 지키며 살아간 강건한 의지의

토지의 ‘서희’가 떠오른다.


은수는

교단에서 만난 첫 제자이지만

제자이기 전에

한 존재가 자기 자리를 지키며 그 자리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지를

내게 깨닫게 해 주는 사람이다.


24살에 만난 사제 간의 인연이

그리움의 파도로 밀려오며

사랑을 전할 때,

나는 이렇게 언어로 화답한다.

이제는 그리움이

내 삶의 한켠에 따뜻하게 자리잡으며

보람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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