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023년 5월
동기, 목표, 체력, 업무 분장(직책), 뭐 하나 제대로인 게 없던 전 부서.
2022년 2월
타의 70% 자의 30%로 들어간 새로운 부서에서 나 혼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맡았다. 열심히 로드맵을 그리고 다른 사업부들의 실례를 들어가며 어떻게 이 큰 일을 쪼개서 해야 할 것이며, 나 혼자 짊어져야 한다면, 한정된 자원으로 어떻게 진전을 시킬 것인지에 대한 토론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애당초 내가 오고 싶어 온 자리도 아니고, 다른 곳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예산에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인지라 도무지 신이 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나의 어젠다는, 사업의 크기만큼 예산과 인원을 늘려 팀을 만들고 팀장이 되자는 것. 나의 상사도 이 비전에 동의하였고, 주변 선례도 많았다. 특히 운이 좋게도 이미 내 길을 걸었던 분이 멘토도 자청해 주시고, 자기 부서의 자료나 부서원들 까지 다 지원해 주셨다.
그래. 일 년만 죽도록 해보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지 않았던가.
처음 배우는 소프트웨어도, 전임자가 싸놓은 똥을 치우는 것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일 년만 참고 성과를 내면 승진을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에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든 생각.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일하는 거지?
생각해 보니, 월급도 많이 안 올려주고 직급도 안 높여주는데 일만 뭉텅이로 던져주는 게 아니었나.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닌 것 같다. 승진할 때까지만 존버하면서 다른 곳을 좀 찾아보자.
워라밸은 어떻고? 여긴 주 37시간만 일하면 되는 워라밸의 나라 덴마크 아닌가!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몸 갈아서 일을 해? 일을 많이 할수록 내 시급만 싸지는 게 아닌가?
이렇게 현타가 오고 나서 생각해 보니, 직장 외엔 따로 즐거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뭐 나오는 것도 없는 직장에 나 갈아 넣지 말고 취미를 찾자. 그래서 작년에 살짝 발만 담갔던 골프를 다시 시작했다.
특히 해가 긴 여름, 혼자 나가서 9홀을 돌다 보면,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일할 시간이 어딨어! 골프 칠 시간도 없는데!
이렇게, 직장생활 10여 년 만에 칼퇴하는 삶, 저녁이 있는 삶을 찾게 되었다.
지난 1년. 말 그대로 “존버”하며 버틴 것 같다. (칼퇴 근무 시간 내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감. 여전히 터무니없는 지원. 예산을 쓰려고만 하면 자꾸 물 먹이는 보스.
이렇겐 도저히 못해먹겠다!
그래서 몇 주를 꼬박 매달려 사업 안을 다시 갈고닦았다. 임원들에게 드디어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타 사업부 사례 조사, 예산안, 로드맵, 일의 우선순위와 이유 등등.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잘 짠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시간 넉넉히 두고 미리 자료 공유도 하고, 예상 Q&A도 준비하고, 그날 입을 옷까지 다 준비했다.
근데 이 사람들은 도통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준비 자료에 이미 다 적어놓은 질문, 혹은 내가 보고 초기에 논외로 명시한 것들만 꼭 집은 질문 등을 던지는 것 아닌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게다가 최악인 건, 정기적으로 체크인을 하고 승낙을 했던 부사장까지 자꾸 말을 바꾸는 것 아닌가?
결국 내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은 막상 반밖에 보여주지 못했고, 직장생활 통틀어 거의 최악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거지 같았던 회의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참 신기하게도 (어이없게도) 사업계획서 통과는 되었는데, 예산은 통과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전에 타 부서에서 파견하기로 한 인력도 해당 부서장은 말도 못 듣고 부사장이 독단적으로 준 거라 결국 파견이 결렬.
그 말인즉슨, 제시한 일은 다 하되, 돈 들이지 말고 혼자 다 해봐라란 뜻 아닌가. 3인분 같은 1인분. 사업 규모가 (예산과 인원이) 크지 않으니, 승진도 안 시켜준단다.
의욕과 재미는 진작부처 없었지만, 마지막 정 줄 붙잡으며 애써 끌어온 일인데, 이젠 망했다. 게다가 부사장은 주력사업이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넘들 기대치만 높여 놓고, 난 이제 혼자 그걸 다 어떻게 수습하나.
그전에는 그나마 욕하느라 에너지가 넘쳐났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동안 조력자라고 생각했던 내 보스와 임원진들도 이젠 믿을 수 없어졌다. 궁지에 몰린 것 같고, 단물만 쪽 빨아 먹히는 형국 같았다.
본격적으로 번아웃 증상이 나타났다.
그저 신이 안 나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거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 증상이 심해졌다 (혹시나 싶으신 준들, 번아웃 증상 참고하세요):
회사 건물만 보이면 숨이 가빠지고 눈물이 난다.
매사에 짜증과 화가 많아진다. (3만 화내도 될 일을 7로 분노한다)
메일이나 자료 내용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잠이 많아지는데, 수면의 질은 낮아진다. (자도 자도 개운하지 않음)
몸 어딘가가 찌뿌둥하거나 한 곳이 계속 결린다. (나의 경우, 예전에 웨이트 하다 다쳤던 오른쪽 어깨가 말을 안 듣기 시작한다)
우울해지다 보니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자꾸 인상을 찌푸린다.
이직 준비를 하려고 공고를 읽어봐도,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인다.
결국 보스도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이직을 했다. 그나마 내편이었던 사람이 떠나니, 정말 도저히 못 버티겠다.
병가를 내버렸다.
생각해 보니 여길 벗어나야 이 거지 같은 증상에서 벗어나는 게 아닌가. 집에서 달리기만 한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직해야겠단 신념 하나로 2주 만에 복귀, 사내 네트워킹을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이 회사 근속 10주년이 되었다. (중간에 10개월 나갔다 온 전적이 있는데, 사규상 12개월 이내에 돌아오면 근속연수가 계속 카운팅 된다. 이 얘기도 다음 기회에.)
한 회사에서 10년 “버틴” 나 자신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미련하다”는 생각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
이런 상태로 더 다니다가는, 회사 곳곳에 “가늘고 길게” 생존해 있는 우울한 인간들과 비슷해질 것만 같았다.
이직 준비로 네트워킹하고 이력서를 낼 때는 아드레날린 덕인지 힘이 샘솟았으나, 본업을 할 때면 전과 같은 증상들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회사 생활 하다간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아, 그나마 힘과 정줄이 조금이라도 붙어있을 때 퇴사하기로 한 것이다.
2014년의 존버하는 나와 2022-23년의 나를 비교해 보니 대답이 선명해졌다.
1. 동기(Motivation)와 보상의 부재 (재미, 배움, 금전)
14년엔 0의 상태로 들어오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새롭고, 매일매일 성장하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학생 시절 그야말로 푼돈을 벌다가 어엿한 직장인의 연봉까지 받지 않았는가.
23년엔 말년 병장 제대만 바라보듯 승진만 바라본 것 같다. 어차피 재미도 없는 부서에 들어왔고, 하던 일도 전 부서와 별다르지 않았던지라, 내가 갖고 있던 능력만 곶감 빼듯 써먹고 얻는 것은 없단 느낌이 강했다 - 이 한 해는 물경력이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듯하다. 게다가 연봉은 개미 눈물만큼만 올랐다.
2. 목표 설정과 측정 방식의 문제
2014년엔, 승진 외에도 이 회사 최고의 컨설턴트가 되자는 목표가 있었다. 장기적으로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커리큘럼을 만들고, 레벨업 하는 기분으로 각종 프로젝트에 임하며 회사를 다녔다.
2022-23년엔, 사실 승진 외의 내적 목표는 없었던 것 같다. 팀을 키우고, 사업을 키우는 것도 까놓고 보면 내 승진을 위한 것일 뿐. 좋은 멘토와 네트워크까지 있었으나, 나는 진실되게 배우고 성장하는 것보단 젯밥 (승진)에만 눈이 멀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성공을 규정짓는 잣대도 승진 단 하나였던 것. 하나 이것은 나 이외에도 상사, 정치, 임원, 인사부, 사업부 전체의 예산/방향 등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지 않은가.
3. 체력 저하
팔팔한 20대에 운동과 식단도 열심히 했던 2014년. 하지만 지난 1년 반 동안은 그렇게 치열하게 관리를 하지 않았다.
슬금슬금 쪄가는 살도 나이가 들면 다 그런 거겠거니 하며 무시하고, 취미란 핑계도 와인을 마시는 빈도도 눈에 띄게 늘었다. 게다가 골프가 무슨 운동이 된다고. 시간이 없단 핑계로 따로 운동을 하지 않은 기간이 꽤 된다. (다행히 날이 추워지면서 다시 헬스클럽으로 돌아왔지만)
이렇다 보니, 내 배터리의 용량이 더 적어졌고, 그래서 더 스트레스나 번아웃에 취약했던 것 같다.
4. 거지 같은 전 부서, 업무 분장
수많은 반성에도 불구하고, 새로 옮긴 부서의 정치적 상황(내 보스가 결국 도망간 걸 보니 더 자명해졌다)과 내가 잘할 수 없는 일(큰 기대치와 지나치게 적은 자원)이 또 하나의 큰 원인임은 자명하다. 다른 사업부에서 괜히 이유 없이 높은 직급의 팀장과 여러 팀원을 투입했겠는가.
결론적으로, 나의 경우, 번아웃의 원인은 과도한 업무나 힘든 생활이 아닌, 나의 내면 (동기, 목표와 성공 척도)과 외면(체력)을 기르지 못했던 탓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독자분들께 질문!
혹시 번아웃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나요? 여러분은 언제 어떻게 번아웃을 감지하셨나요? 극복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어떻게 번아웃을 극복하고 제자리로 돌아오시거나 더더욱 도약하실 수 있었나요?
*사진 출처: www.range.co, 문제시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