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절멸 우회로

무저항의 말로는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by 휴사


내 몸에는 어린 사람에게 그리 흔하지 않은 병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사적인 사연이기에 그것을 귀찮게만 여겨왔다.


내게 드리운 병은 단어 그대로 죽을병이라 날 한 순간에 없애버릴 수도 있고

잠시 지나가는 몸의 변화에 그친 착각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난 타인보다 심장이 빨리 뛰었고 그 사실은 날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내 꿈과 이상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삶의 의지로 변환시키려 오늘도 고민하고 있다.

이렇게 써놓으니 마치 주어진 모든 것을 바치며 어떻게든 병을 고치려는 강인한 사람인가 싶을 테지만

현 시점의 내 모습은 아이러니하게 이 병에 크게 관심 없는 태도를 보이며 현재의 삶을 일관하고 있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건 고통의 총량에 유의미한 변화는 없을 것이고 그저 낫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경우뿐이니 이제껏 해왔던 행동으로 최소한의 조치만 취하고 고칠 방법을 찾아다니는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필요하지 않다고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놓고 있다.


침묵의 비명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게 하는 젊음으로써 아직까지 내게는 살아갈 힘이 있었다.

그 사실로 나는 죽음의 흐름에 나를 맡기기보다 곧 내일 죽을 것처럼 살기를 택하는 쪽이 내게 활력을 불어넣고 그런 삶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더 남는 것을 즐기게 되었고

그 설명을 풀어보자니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첫 번째 특질이 찾아왔던 것은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17살의 무렵이었다.

어느덧 고등학교에 들어서고 이곳에선 좀 더 성숙해지면 좋겠다고 문약한 다짐을 했을 무렵에

심장이 대뜸 비명을 질렀다.

나중에야 측정해 본 내용이지만 그것은 분당 평균 박동을 아득히 뛰어넘는 분당 170회라는.

불필요하게만 느껴지는 수치가 소리소문 없이 어린 나에게 다가왔다.


가만히 앉아 버스를 기다리던 도중에 겪은 일상 중의 흔한 곳에서 겪은 기억이라 크게 와닿는 느낌은 아니었었다.



처음엔 운동부족이라 생각했다.

그 막연한 단정은 6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이어지는 현실로서 간단히 묵언되었고 아직까지도 병의 근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중간한 검사들로는 꼬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 정밀한 검사를 받을 틈도 없고 구태여 노력도 하지 않는 나에게는 딱 그에 어울리는 말로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역시 중 3 때 흡연에 손을 댄 게 문제였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아 두려움에 질린 나는 다행히 흡연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아 나름대로 간단히 끊어내었다.

생각이 날 때마다 계속 시선을 돌렸고, 거절했고, 외면했으며, 다리를 떨었다.

흡연이라는 내세우기 쉬운 이유 따위는 현재까지 금연을 이어가는 일상 중에서도 고개를 내미는 심장의 약동에 묵살되어 버렸다.

남들에게 구태여 티 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란 한편으론 이렇듯 중독마저 끊게 하는 압도당하는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고통을 겪고 나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살면서 제대로 내 몸을 검사해보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

서고 나서야 행동으로 옮겨 보았지만 매번 원인불명의 진단이 날 답답하게만 만들었다.

증상이 나타날 때 측정을 해야 정확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 자기 일이 아니니까 이렇게 말하겠지.


다수의. 아니 내가 지금껏 가본 의료기관 전부가 그런 식으로 단언하는 과정에서 내 인내심과 중요도는 바닥을 보였고 불감적인 태도만 커져갔다.

무엇하나 시원하게 풀리는 사실 하나 없이 나는 언제까지 나를 깎는 병을

그저 별것도 아닌 것으로만 치부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평론적인 답변이 나를 죽이게 된다면 어떻게 하려고 나를 진료하는 자들은 이토록 무관심하게 일관할까?

객관적으로 보면 날 진료하는 이들의 무딘 태도는

그들의 업무량에서 오는 피로에 의한 것일 뿐이고

내가 나에게 보내는 무관심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평이한 것이라고 느꼈지만

이때의 나는 결코 남 탓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젊음이라는 소금과 같은 가치에 취해 몸을 가벼이 여겼다.

쉽게는 변하지 않는 현실을 딱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

내가 불감증인 건지. 아니면 세상의 기준이 생각보다도 낮은 것인지..

솔직히 말하면 누구도 내 사정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우울에 조금 갇혀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산다면 이것이 당연한 모습인데도.


가족력이란 단순한 변명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다들 건강하고 활기찬 핏줄들 사이에서 나는 나 자신이 돌연변이처럼 느껴져서인지 가장 가까운 관계임에도 그들은 이에 대한 해답이자 도피처도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큰 변화 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일정하니 버틸만한 고통의 무딘 일상을 그저 낙천적으로 바라볼 수는 있는 정도였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비일상적인 문제점이 내 몸에 몰래 다가왔다.




그러고 살다 보니 어느덧 스무 살을 넘겼고 나는 자연스레 머리를 밀어버리고 입대를 했다.


난 예전부터 땀 빼며 몸 쓰는 일이 싫어서

입대 후 아래 서술된 세 가지의 지옥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취사병, 공병, 포병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중에서도 알고 지내던 공병 출신이 들려주는 후일담에 크게 질려 나름대로 물심양면 노력한 결과 체력을 그다지 소모하지 않는다는 장비를 운용하는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앞날에 대한 기피만이 꼭 절대적인 해방책이 되어주지는 않았나 보다.


입대 후 큰 탈 없이 1년 가까이 지났을 무렵 신체검사를 마치고 혈소판 수치 증가.라는

살면서 처음 들어본 나름대로 희귀하다 느끼는 증상이 다가왔음을 알았고

이 순간에도 묵언하는 몸의 변화에 초조함을 느꼈지만 한편으론 의연해했다.

그야 1년간 유지되어 온 군대라는 극적인 환경변화와 지병이 맞물린 게 아니겠냐는 뇌피셜이 당장의 의문을 지웠지만

내가 그러고 있는 게 답답하다는 듯 간부 쪽에서 내 수치변화에 따른 원인을 나서서 직접 보여주었고

단순 엄살이나 별것도 아닌 걸로는 쉽게 변화하지 않는 게 혈소판 수치라는 정보를 접하고 약간의 거리감과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내 오랜 병과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입대 후에 변화된 삶에 의한 것인지

그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고 설명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몸에는 이미 변화가 드러났고 내가 이 사실에 저항하지 않았다가는

마치 부패할 것만 같은 나날이 고개를 살짝 내미는 듯하여서 몸을 움직였다.

그럼에도 군대라는 우리 안에서 심각성을 깨달아봐야 딱 거기까지.

이 이후로 몇 차례 의미 없는 검사를 하고 나서 계절이 바뀌어만 가도 늘어나면 늘어났지 그 수치의 정상화는 진행되지 않았다.

나중에 호기심에 검색해 보니 이러한 수치가 말해주는 상태는 크게 세 대목으로 갈라졌다.


내부기관의 손상


특이체질



지금껏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이 셋 중 어떠한 것도 내 삶과의 일체 관계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정하게만 느껴졌다.

조용한 비명을 지르기만 할 뿐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는 몸에 지금껏 이상하리만치 무관심했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 더 내가 싫어졌을 뿐.


난 옛날부터 잃고 나서야 챙기는 타입이었고 이렇게 뒤늦게 후회했다.

결국에 와서는 조금만 더 버티고 사회로 나가 치료받으면 된다는 흔하고도 불확실한 위안감만이 남게 되었다.


최근 내 몸을 긁는 이 두 가지 증상에 대뜸 신경이 거슬리는 요즈음.

젊음과 건강이라는 필파(必破)될 방패 뒤에 앉아 정신만이 편안히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나란 놈의 무책임하고 무감각한 모습이

남는 게 시간이라 여겨 삶을 땅에 흘리는 어리숙한 자의 가벼운 판단만은 아니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남게 되었다.

고통을 이제는 따위 취급하지 말아야 하려나.

역시 아픔을 우회하는 것보다 정면으로 맞서는 편이 이상적인 최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껏 그려왔던 그림에 더 힘을 주려 하고

쓸 생각도 하지 않던 글을 쓸 정도니

이에 대한 나의 변화가 결국에 절멸만큼은 우회하려 하는 본능의 표출된 결과물인 것일까?

사람이 갑자기 바뀔 때가 죽을 때라는데.


코웃음이 쳐졌다.







사실 죽는다는 게 뭐 그리 큰 변화인가 싶어 이러고 사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어떻게, 어디까지 기억되느냐고

무엇을 남겼으며 무엇을 탄생시켰는지가 결국에는 마지막에 남아주는 것이기에 미량의 아쉬움만을 남기고 여지없이 죽을 예정이다.


중요한 것은 죽음의 형태도, 시기도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과 태도임에 분명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