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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윤희 Mar 14. 2023

달래어 조정하는 행위로서의 정치

[의원 중 가장 만만한 기초의원 이야기] - 열둘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나도 요약본을 보았다. 드라마가 그토록 인기 있었던 이유가 뭘까? 아마도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권선징악의 질서를 드라마가 대신 실현해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완벽한 복수만큼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것도 없으니... 내세를 생각하고 종교에 기대는 이유도 권력자나 부자만 면죄되는 이곳의 질서는 개나 주고, 끝내 저기의 법이 임하기를 희망하는 마음이 아닐까?      


사람들은 장렬한 복수극에 열광하는데 내가 이즈음 배우는 것은 타협이다. 타협... 처음 배운다. 배우면 안 되는 것인가, 배워야 하는 것인가? 뜻을 보니 ‘두 편이 서로 양보하여 협의함’이다. 뜻이 나쁘지 않다. 그런데 나는 왜 나쁜 말로 배웠을까? 어디서 그런 분별심이 생겨났을까?      



90년대 학번인 나는 강의실보다 집회 현장에 더 많이 앉아있었다.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그 자리는 나를 살아있게 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 마냥 한목소리를 내는 일, 부정한 것들을 벌하기 위해 싸우는 일은 늘 가슴을 벅차게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그 자리가 내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사심의 공간이기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옳은 사람이야, 그러니 가치 있는 사람이야, 라는 확신을 위해 필요한... 어린 시절 불화하는 부모 아래서 자존감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나는 그렇게 생존했다. 집회를 밥 먹듯이 나간 데는 그런 이유도 분명 있었다.      


모든 일에 음과 양이 있듯, 그 과정에서 내가 옳다는 아집, 부정한 것과의 투쟁이 가장 가치있다는 고집도 생겨났다. 그러니 타협 같은 개념이 내게서 자리잡을 일은 없었다. 타협한다는 건 비겁한 겁쟁이의 행위에 불과했다.      


의원직의 매력,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기초의원의 매력(?) 중의 하나는 기초의원을 하지 않았다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 그러니까 가치관과 정치성향이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살아간다. 그것은 나이가 들수록 심해져서 노년엔 허락된 사람만 곁에 남아있게 마련이다. 다양한 크기의 과일이 선별기계를 거치면 결국 비슷한 사이즈끼리 한 박스에 모이는 것처럼...  


그런데 의회는 강제적으로 서로 다른 것들이 모인다. 상임위가 열리는 날이면 타당 의원들과 종일 한 회의장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섞어야 한다. 물론 국회의원이나 도의원도 그렇지만 규모가 적은 기초의원이 가장 심한 듯하다. 사무실도 붙어있고 밥도 같이 먹어야 한다. 의원이 되고 나서 반년쯤, 나는 그것이 너무 괴로웠다. 좋아하는 사람과 어울려 살기도 짧은 인생에 왜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지 수용하기 어려웠다.       


지난 반 년, 열심히 싸움과 투쟁의 의정활동을 해왔다. [출처 : uriel-soberanes-unsplash]


안성시의회 운영이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어서 나의 이런 고통은 더욱 가중됐다. 다수당은 그동안의 관례를 무시하고 의회의 모든 직위를 독식했고, 사상 유례없는 조례 부결률을 기록했고, 사상 유례없는 예산 삭감을 감행했다. 합리적 이유는 없었다. 내가 보기엔 타당 시장의 시정 발목잡기에 다름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소수당 의원인 나는 그리하여 열심히 싸웠다. 물론 폭력을 행사하거나 혈서를 쓰거나 가스통을 대동하지는 않았다. 보도자료를 내고, 피켓시위를 하고, 시민들께 호소하는 등, 문명화된 싸움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떤 성과가 있었던가...      


싸울까, 타협할까? 여기는 현실정치판      


표결로 이뤄지는 의회구조에서 ‘싸움과 투쟁의 정치’는 어떤 성과를 남겼나. 성과라면 작금의 상황이 어떻게 옳지 않은지를 시민께 알렸다는 것, 다수당이 우리의 행위에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받아 가끔 스텝이 꼬였다는 것, 그리하여 소수당이지만 마냥 무시할 수는 없게 존재감을 세웠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그 다음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정치권의 극단적인 대치로 급기야 안성시에 쓰레기 대란이 일어나면서다. 피해를 보는 것은 그저 시민들이었다. 서로 네가 틀렸다고 으르렁대는 정치권은 시민의 삶을 좀먹고 있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상대도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다. 나만 그들이 싫은 게 아니었다. 그들도 나 못지 않게, 나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전향을 고민 중이다. 싸움과 투쟁의 효용성보다 이제 화해와 타협, 조정의 가치를 발굴해보려 한다. 물론 이제 8개월 의원 해보고 하는 소리여서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그러하다. 누가 잘잘못을 가릴 것인가? 여긴 사막이고 길은 따로 없으니...       


오래된 책을 꺼내, 밑줄을 그어본다. 버나드 크릭이라는 영국 정치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 정치는 획일성보다 다양성, 폭력과 강압보다 ‘달래어 조정하는 행위’

- 달래어 조정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를 통해 다채로운 생각들이 경합하고 조율될 수 있어야

- 정치는 선과 악의 대결이 될 수 없으며, 또 되어서도 안 된다

- 정치는 자연적 사물이나 인간이 활동을 멈추어도 계속 존재하는 예술작품 같은 물체가 아니라 ‘복합적인 행위’이다. 단순히 이상을 향한 아집이나 자기이익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버나드 크릭, 정치를 옹호함

정치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세상에는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있고, 무엇이 어찌되었던 우리는 갈등을 조정하고 규칙을 만들어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 그럼 존중을 기반으로 한 대화와 조정, 토론과 협의가 당연한 도구로서 필요하다는 것. 내가 옳다고만 고집하면 상대는 악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악이 되어버린 상대와는 아무런 결실도 맺을 수 없다.      


고백하건데 싸우기만 해서는, 극단적인 대립만으로는, 현실정치에서 이룰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음을 깨닫는 중이다. 평생 온몸에 힘을 주고 살아갈 순 없어서... 투쟁이 최선일 때도 있지만 삶은 그와 꼭 마찬가지로 포용과 존중, 타협이 최선일 때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물어본다. 변명을 보태자면 여기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공간이 아니라, 2023년 대한민국 한 지방의 일상적 정치의 공간이지 않느냐는 것. 누구는 구차하다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저 멀리서는 또다른 누군가 말한다. 손님, 힘 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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