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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ry night Feb 27. 2023

세상의 모든 표준화 시험에 의문을 던지다

2014. 6. 21-22

2014.6.21. 토요일

선생님, 

한동안 제가 편지를 보내드리지 못했네요. 두 개의 세미나와 발표를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봄학기가 거의 다 지나가 버렸어요. 이번 편지에서는 안부를 여쭙는 제 마음이 복잡하고 무겁습니다. 지난 두어 달은 잔인한 시간이었지요. 한국 사회에 깊게 패인 슬픔과 분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사회적 치유로 이르는 출구는 어디에 있는지 아직 찾을 길이 없어 보입니다. 거기에 더해 정신없이 흘러가는 대한민국 학교의 일상과 부쩍 무더워진 여름 날씨 속에서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오늘은 일 년 중에 낮이 가장 긴 날인 하지입니다. 저는 지금 빠리의 지하철에서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편지를 쓰고 있어요. 그물망처럼 빠리 시내를 촘촘하게 에워싸고 있는 지하철, 그 속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저는 익명의 여행자가 됩니다. 지금 7호선을 타고 있는데요, 오페라와 루브르 박물관을 거쳐 샤틀레에서 1호선으로 갈아탄 다음 빠리 동부 외곽에 있는 방센느 숲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가 빠리에 온 이유는 이번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열렸던 교육정책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어요. 낭만과 예술의 도시 빠리와 교육 정책 세미나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한 쌍 같았지만, 프랑스인들의 발표 및 토론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제가 있는 핀란드의 뚜르꾸 대학과 프랑스 빠리의 시앙스뽀(빠리정치대학) 박사과정 학생들과 교수 서른여 명이 돌아가면서 발표를 하고 질의응답을 진행했습니다. 저는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 피사)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그 내용을 발표했어요. 한 때 미셸 푸코라는 철학자가 쓴 꽤나 어려운 책이 휴가철에 베스트셀러가 된 나라의 교수들과 박사과정 학생들을 앞에 앉혀놓고 발표를 하는 상황인지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작년 말부터 피사 보고서와 참고문헌을 읽고 선생님과 토론을 하면서 생각을 거듭해 온 내용들을 떨리지 않은 척하면서 그런대로 잘 발표했습니다. 제 발표에 관심을 보이는 질문들도 많이 받았고요. 그런데 프랑스 발표자들 중에서는 주어진 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사회자가 3분 남았다고 알려주자 이제 결론을 이야기하겠다면서 그때부터 15분을 더 말하기도 하더군요. 그것 때문에 세미나 일정이 한참 더 길어졌는데도 말이지요. 프랑스 교수님 한 분께서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데 친숙한 환경에서 자라온 프랑스인들의 문화 때문에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진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2000년부터 3년에 한 번씩 실시되어 2012년에는 전 세계 65개 국가 및 도시의 만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읽기, 수학, 과학 영역의 역량을 평가한 피사는 이제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육에 관심 있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익숙한,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전례 없이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시험이 되었지요. 피사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성적이 상위권에 속한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자국의 교육제도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받고, 성적이 추락한 나라들은 피사 쇼크라고 부를 정도로 홍역을 치르듯 충격에 빠지는 현상도 나타났고요.


저는 이번 세미나 발표를 통해서 피사라는 시험이 갖는 권위와 권력, 그리고 이로부터 만들어지는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어요. 한국에서는 표준화된 지필 평가가 학생들의 학업 능력을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신념이 아직까지 강하지요. 그런데,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로 대표되는 국내의 표준화 평가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꾸준히 있어온 반면에, 피사를 비롯한 국제 표준화 평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아요. 피사가 세계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 낸 서열은 국내의 일부 교육자들이 피사에서 줄곧 상위권을 차지해 온 핀란드 교육 제도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제가 핀란드나 빠리에서 대화를 나누었거나 글로 접한 외국 연구자들 중에서는 피사라는 시험과 그것을 주관하는 OECD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꽤 많아요. 이 분들이 하신 말씀 중 일부를 전해드리자면, 피사에서 각국이 얻은 점수와 순위가 3년을 주기로 공개됨에 따라 멀리 내다보고 꾸준히 추진해야 할 국가 교육정책이 불신을 받아 갑작스럽게 방향을 틀기도 했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피사와 같은 시험에서 성적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학교 교육이 운영되다 보니 학생들의 전인적인 성장과 발달을 해칠 우려가 크다는 거죠. 마침 올해 5월에 세계의 여러 학자들이 영국 일간지 가디언을 통해 피사 총책임자에게 2015년 피사 시행을 중지할 것을 제안하는 공개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요.*

지하철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고 있네요. 그럼 나머지 편지는 다녀와서 쓰도록 할께요. 


2014.6.22. 일요일

어제 편지에 이어서 씁니다. 

저는 피사라는 시험과 한국에서 핀란드 교육이 우수한 피사 성적으로 말미암아 주목을 받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전 세계 학생들의 학력을 비교 평가하는 이 거대한 시스템이 각국의 교육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선생님도 예전에 말씀하셨듯이 일본의 경우에는 피사 2003에서 결과가 예상보다 저조하게 나온 것을 이유로 학생 중심, 체험 중심 학습을 강조한 유토리(여유) 교육과정을 폐기하게 되었죠. 핀란드는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교육정책을 요구하는 압력이 나라 안팎에서 커져 가는 상황에서 때마침 2000년부터 피사에서 연속으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이 평등 중심의 종합학교(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 정책을 유지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해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표집 방식으로 실시되어 오던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가 공교롭게도 2008년부터 해당 연령의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전수 평가 방식으로 확대되었지요.** 그리고 피사 2009 보고서에서는 한국을 우수사례로 언급하면서 한국의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소개했거든요.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까요.


물론 피사가 전 세계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기 때문에 각 나라들이 교육정책을 수립할 때 유용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장점도 있지요. 하지만 읽기, 수학, 과학 영역에 한정된 표준화 시험인 피사가 과연 9년간의 학교 교육을 마친 열다섯 살 학생들의 지적 성장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문화와 교육환경이 다른 청소년들의 성장과 발달을 수치로 계량화하여 평가한다는 발상 뒤에는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리고, 피사를 통해 국가 간 학력 경쟁의 구도가 심화될수록 피사가 강조하는 읽기, 과학, 수학, 기술, 공학 이외의 영역들, 즉 표준화된 평가로 측정하기 힘든 인간의 다양한 능력과 교육 목표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경제적 가치로 치환하기 쉬운 응용과학, 기술공학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인문·사회과학, 예술 분야에 대한 불평등 현상을 심화시키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 말 그대로 경제 협력 개발 기구를 뜻하는 OECD는 피사를 통해 국가 경쟁력에 보탬이 되는 지식에 무게를 싣고, 학교 교육의 목적을 지나치게 경제적 유용성 쪽으로 끌고 가는 것 같아요. 


학교 교육이라는 것이 경제적 가치로 교환될 수 있을 때에만 가치로운 것일까요? 표준화된 시험으로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지식은 시험으로 측정할 수 있는 지식에 비해 중요하지 않은 걸까요? 수요일 아침 빠리에 있는 OECD 본부에 잠깐 들렀을 때 제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존 듀이(John Dewey)가 말했듯이 학교라는 곳은 미래의 성공을 위해 학생들이 현재에 누려야 할 삶의 가치와 행복을 끊임없이 유예시키는 장소가 아니라, 학생들이 ‘지금, 여기’의 삶을 경험하고 긍정하면서 전인으로 성장해 가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이제 핀란드로 돌아가는 비행기 출발시각까지 네 시간 정도 남았네요. 공항으로 가기 전에 무얼 할까 하다가 까페에 들러 편지를 마저 쓰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 도시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더 눈과 마음에 담아두면서 작별 인사를 건네기에 까페만큼 좋은 곳이 없네요. 한 때 사르트르가 지인들과 함께 단골로 찾아와 토론을 벌이곤 했다는 이 까페에 요즘도 철학 토론의 열기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요일 오후 까페를 찾은 노년의 커플이 맞담배를 피면서 두 시간째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제 눈에는 흐뭇한 정경이었습니다. 빠리 사람들은 까페에서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기도 하지만 까페의 테라스에서 서로의 옆에 나란히 앉아 함께 거리 풍경을 구경하는 것 또한 좋아하지요. 저도 그들처럼 누군가의 옆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소중한 가치를 오래도록 함께 지향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공기 중에 투명하게 부서져 흩어지는 이 도시의 여름 햇살과, 그보다 더 가볍고 명랑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한동안 그리울 것 같아요. 전 그럼 이제 샤를 드 골 공항으로 가보겠습니다. 


유월 이십이일 빠리에서,

J 드림 


*The Guardian. 2014. “OECD and Pisa tests are damaging education worldwide – academics.(OECD와 PISA 시험이 전 세계적으로 교육에 해를 가하고 있다 – 학자들의 공개서한)” 가디언지, (2014.5.6.). https://www.theguardian.com/education/2014/may/06/oecd-pisa-tests-damaging-education-academics

**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1998∼2007년) 때 표집 방식이었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2008∼2016년) 때 전수평가로 전환됐다. 학생들이 같은 날, 같은 문제를 푸는 방식이어서 '일제고사'로도 불렸다. 하지만 지역별·학교별로 성적이 공개돼 서열화 부작용을 낳는다는 지적에 따라 문재인 정부 들어(2017년) 표집평가로 회귀했다. 2022년에는 중3, 고2 학생의 3%를 대상으로 표집평가(국, 수, 영)를 실시했다 (연합뉴스 기사 참조 :https://www.yna.co.kr/view/AKR20221021065300530).

*** Dewey, J. (1916) 2010. 민주주의와 교육. 이홍우 옮김. 교육과학사(개정증보판). 514-515쪽 참고.

**** 커버 출처: https://coreaone.net/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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