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2021년 1월, 코로나가 전세계를 덮친 지 일 년이 되던 때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털어서 이탈리아로 갔다. 캠핑카로 유럽을 여행하겠다는 꿈을 품고.
그 시작은 1년 반쯤 전이었다. 남편과 나는 아등바등 일하며 삼십 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그 무렵 내 상황과 힘들었던 마음 상태를 지면에 다 옮기지 못하지만, 다만 그때 떠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어떤 예감이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그저 먹고 사는 일로 자신을 소모하며 나이 들어 갈 뿐이라는 예감. 그러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 다르게 살아 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리라는 예감.
어느 날 저녁, 이탈리아인으로 원래 유럽 장기 캠핑카 여행의 로망이 있었던 남편이 그날도 어김없이 유튜브로 캠핑카 여행 영상을 보고 있었다. 이전에도 별생각 없이 몇 번 같이 보기도 했었는데, 나는 늘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아서 와닿지 않았었다. 그들은 유럽이나 북미 국적의 이십대 초중반 젊디젊은 커플이거나 프리랜서거나 은퇴하고 연금을 받는 부부여서 그런 생활이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상은 나와는 접점이 없는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고, 볼 때마다 그들의 충만한 젊음이, 경제적 여유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문득, 우리가 정말 할 수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주 젊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늦은 나이도 아니고, 경제적 여유는 없지만.. 가진 걸 다 턴다면? 그리고 오래된 캠핑카를 싸게 사서 고친다면 장기 여행을 못 할 것도 없지 않을까?’
깊은 내향인인 나는 늘 내면 깊숙이 사람 사는 세상과 고립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인생에서 긴 시간을 넉넉하게 잘라내어, 조용한 해변에서 고독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싶은 열망이. 그런 시간들로 이루어진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여행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평생의 꿈 같은 거였다고 생각한다. 못 하면 회한이 남을 것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실행에 옮길 엄두는 내 보지 못한 그런 것. 그런데 문득 캠핑카 여행이라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마침 남편도 원하던 일이라(남편은 그저 캠핑카 여행이 하고 싶었을 뿐이지만) 든든한 동지까지 생긴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이라는 태그를 달아 마음속 깊이 묻어 둔 꿈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삼십 대 중반이 넘은 시점에 내가 깨달은 것은, 어차피 우리 인생에 충분한 여유가 생기는 날은 오지 않을 테고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언제가 되든 인생을 걸어야 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그나마 뒷감당이 가능한 때에 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여유가 있는 날인지도 모른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계산해 보니 오래된 캠핑카를 사서 직접 고치고 최대한 돈을 아끼면서 여행하면 2년 정도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가진 걸 거의 다 털어야 하니 그 후에는, 즐거운 시간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난 후에 우리는 삼십 대 후반의 나이에 거의 빈털터리에 가까운 상태가 될 거였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실행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두려운 일이어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형편이 괜찮아서, 또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때는 오랫동안 학자금을 갚고 보증금을 모으며 둘이서 복층 원룸, 반지하 투룸 등 작은 월셋방을 전전하다 중계동의 작고 오래된 아파트에 전세자금대출을 받아 들어간 지 겨우 1년쯤 됐을 때였다. 기댈 곳도 가진 것도 없는 두 사람이 만나 그나마 집다운 집에서 살기까지 거의 10여 년이 걸렸는데, 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허물고 또다시 바닥부터 시작하는 것을 의미했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몇 개월을 더 망설이며 보냈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태어나 살아있다는 것을 기쁘게 느낀 적 한 번 없이 앞으로 몇십 년을 더 살아갈 동력이 나에게 있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살아가다가 건강을 잃거나 아등바등 모아가던 돈을 잃게 된다면 그동안의 내 인생은 뭐가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내내 마음속을 맴돌고 있었다. 마음에는 늘 우울이 드리워져 있었다. 몇 십년 동안 자신을 소모하며 먹고 사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에 회한을 느낄 거라면 내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결국 그 대가로 이후의 인생이 훨씬 힘들어지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고 그 힘으로 살아가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두가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는 한국을 떠나서, 유럽을 떠돌며 여행한 후에는 남은 돈으로 어느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해 우리 둘이서 열심히 일하며 소소하게 살아가자고. 그렇게 결심한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처분하고 보험도 전세자금대출도 다 해지하고,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털어 한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다. 그런데 웬걸, 코로나로 내 체류허가증 발급이 밀린 탓에 우리 캠핑카는 2년 동안 이탈리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국경이 막힌 것은 아니라서 나가려면 못 나갈 것도 없었지만 우리는 사소한 것조차 법을 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
시간도 돈도 한도가 있고 계속해서 생겨나는 변수로 인해 여행을 계속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어, 이탈리아 안에서 떠났다 돌아왔다를 반복하며 조금씩 여행을 이어가는 동안 원래의 원대한 계획은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는 시간도 돈도 물이 새듯 우리 손에서 사라졌다. 세상 일 정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 여행기는 그런 이야기다. 큰 결심을 하고 혹독한 대가를 각오하고 떠나왔지만 바라던 대로 실현되지 않았던, 그럼에도 후회할 수 없는 선택에 대한 이야기. 이 책에는 이탈리아에 와서 캠핑카를 사서 직접 고친 일부터 캠핑카를 타고 떠난 몇 번의 단기 여행과 첫 번째 장기 여행까지의 내용을 시간 순서대로 담았다. 이탈리아 캠핑카 여행의 낭만과 현실을 솔직하게 썼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대책 없는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일생일대의 꿈의 실현일 수도 있는 그런 여행. 우리에게 그것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원했던 삶이어서, 단 몇 년이라도 그렇게 살아봐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지금은 빈털터리가 됐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