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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하나

두 번째 교환독서: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by 밤비


옥대장님께.


혼란스러운 이야기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습니다. 오스카의 상상력과 인내심을 따라 현실과 비현실 그 사이의 공간에 살고 있어요. '구성이 독특해서 설핏 난해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소년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아 읽으면서 조금, 슬퍼졌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나요. 저는 조금 다른 결로 슬펐는데요. 그런 소년의 마음은 곧 그 언젠가의 저의 마음이기도 했거든요.


여러 번 말씀드려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친할아버지의 죽음은 제게 조금 특별합니다. 초등학생 때 외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지만 수두를 앓고 있다는 이유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너무 어렸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정확히 뭔가를 소화할 수 없었던 탓이겠지요.


모든 기억이 뒤죽박죽입니다. 담임 선생님께서 안쓰러운 눈길로 제게 다가와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게 중학교 3학년 교실이었는지 고등학교 1학년 교실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병원을 향해 버스를 타고 갔는지, 그 버스 안에서 내가 울지 않으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길가의 풍경이나 제가 탔던 버스 번호는 기억나질 않습니다. 그것만 기억이 나도 그 해가 2002년인지 2003년인지가 확실해질 텐데요. 작년 봄, 온 가족이 함께 소풍을 떠나듯 할아버지를 뵈러 다녀왔습니다. 일부러 비석에서 돌아가신 년도를 확인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이렇게 희미해진 것을 보면 어떤 기억은 회복 불가능한 조각으로 망가지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스카의 아버지는 9.11 사고 현장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총 다섯 번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오전 8시 52분, 9시 12분, 9시 31분, 9시 46분, 그리고 10시 4분. 지금 제가 읽은 분량에서는 두 번째 메시지까지 나와 있습니다. 병원에 막 도착했을 때 제 할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셨습니다. 네, 분명히 살아 계셨어요.


간호사 선생님은 저를 보자마자 의학 드라마 수술실에서나 보던 옷을 차례로 덧입혔어요. 눈물 젖은 다른 가족의 얼굴이 번들거리고 있었습니다. 파란색 머리망과 하얀색 니트릴 장갑, 그리고 마스크까지 모조리 착용한 뒤에야 중환자실 문 너머로 들어갈 수 있었지요. 정면에 할아버지의 침대가 있었어요. 그 때, 저는 할아버지가 꼭 시한폭탄 같다고 생각했어요. 다양한 색깔의 전선이 할아버지의 몸 곳곳에 연결되어 있었거든요. 전선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당장 터져버릴 듯한 형상이었어요. 언제나 나를 향해 지그시 웃어주던 할아버지는 없었지요.


오스카는 아버지의 메시지를 비밀에 부쳤어요. 누가 들을 새라 꽁꽁 숨겼지요. 저는 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없었어요. 기구한 몸짓뿐이었지요. 떨리는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습니다. 대답 대신 찡그린 얼굴이 돌아왔어요. 꼭 감은 눈. 고통스럽게 좌우로 비트는 팔과 다리가 곧 대답이었어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머릿속을 떠 다니던 무수한 단어들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지요. 저는 이윽고 단어를 잃었습니다. "할아버지, 내가 할머니 잘 모실게요. 약속해, 할아버지." 이 말만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보고 싶을 거라는 인사도, 아프지 말라는 걱정도, 너무 무섭다는 투정도 하지 못했어요. 그게 마지막 인사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동시에 마지막 인사가 아니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일 년이 지났어도 나는 여전히 무슨 이유에서인지 샤워를 한다든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에 엄청나게 어려움을 겪었다. 현수교, 세균, 비행기, 불꽃놀이, 지하철의 아랍인들(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닌데도), 레스토랑이나 커피숍 등 공공장소의 아랍인들, 비계, 하수구, 지하철 격자창, 주인 없는 가방, 신발, 콧수염 기른 사람들, 연기, 매듭, 높은 건물, 터번, 나를 공포에 빠뜨리는 대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거대한 검은 바다 속이나 깊은 우주 속에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에게서 멀리멀리 사라지는 듯했다. p. 59



할아버지는 정말 그 날 밤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동안 말을 잃은 채 살았습니다. 일시적 실어증에 걸렸다거나 한 건 아니고요, 일종의 비유로 그렇게 말을 해왔어요. 어떤 것도 제게 의미 있는 단어는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몇 년 전에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그 때, 참 많이 무서웠다고. 제가 꼭 죽은 사람 같았대요. 별문제 없이 일상을 지내고 이상 없이 살아 움직이긴 움직이는데 생기가 없었대요. 말수도 현격히 줄어서 저러다 영영 입을 열지 않으면 어쩌나 겁도 났대요.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 제 모습입니다. 누군가 편집한 것처럼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의 일부가 송두리째 사라져 있는데, 그건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의 시간들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오스카를 보면 자꾸만 그 때의 제가 보여요. 그 시절의 제가 스쳐서 조금 시리고 아파요.



"이건 우리 아빠예요!" 나는 아빠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토머스 셸(Thomas Schell)!" "기막힌 우연의 일치로구나!" 그녀가 말했다. p. 77



오스카는 아버지의 유품으로 보이는 열쇠 하나를, 그리고 빨간색 펜으로 쓴 Black이라는 메모를 발견합니다. 모험의 시작이지요. 오스카는 93번가 미술용품 상점까지 가 닿습니다. 그 곳에서 아빠의 흔적을 발견하지요. 옥대장님, 사실은요. 제 손에도 열쇠 하나가 쥐어진 기분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저에게 이 책은 지금껏 제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것만 같아요.


오스카의 여정을 찬찬히 따라갈 예정입니다. 오스카가 마주할 모든 순간들에서 제가 만날 것이 치유의 빛일지, 상처의 독일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도망치거나 외면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다짐하듯 한 장, 한 장 아껴 읽고 있을게요. 답장해 주실 거죠? 기다리겠습니다.


밤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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