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교환독서: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옥대장님께.
책을 읽다 보면 운명 같은 걸 떠올리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저는 '죽음'이라는 소실점으로 쏜살같이 날아가는 이야기들에 붙들려 있어요. 우선 이 책이 그렇습니다. 이틀 전 완독한 이현 작가님의 <라이프 재킷>이, 오늘 읽었던 김기태 작가님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속 첫 번째 이야기 [세상 모든 바다]가 그랬지요. 각각의 소설들이 다루는 죽음은 여타의 다른 죽음보다 조금 더 진득하고 무겁습니다. 예상치 못한, 급작스럽고 충격적인 죽음들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비슷한 충격이 또 있었던 것 같은데.. 하고 최근 읽었던 책 목록을 더듬어보니 황선미 작가님의 <마당을 나온 암탉>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거 아니겠어요? 잎싹의 죽음이 제게는 자살처럼 느껴졌으므로, 그 역시 심리적 타격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뉴욕에 사는 '블랙'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모조리 만나보겠다고 결심했을 때도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상대적으로는 무의미하다 해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상어가 헤엄을 치지 않으면 죽어버리듯이, 나도 뭔가 해야 했다. (p. 123)
오스카와 아빠가 나눈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오스카의 말에 그의 아빠가 묻지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 내려 핀셋으로 모래 한 알갱이를 집어 1밀리미터 옆으로 옮겨놓는 일에 대해서요. 몇 번의 질문과 답이 반복되는 동안 오스카는 이내 아빠의 속내를 알아차립니다. "제가 우주를 바꿨어요!" 아아. <코스모스>를 읽고 삶의 덧없음에 침잠되었던 때에 이 대목을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잠시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흘렀네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죠. 최근 읽었던 책들 말입니다. 비단 책뿐이었겠습니까. 실제 삶에서도 그런 일은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지요. 사실 저는 유약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죽음들 앞에서 저는 자꾸만 무력해집니다. 곧이어 설명하기 힘든 죄책감을 느껴요. 그들은 죽었는데, 저는 살아있어요. 그들은 왜 죽고, 저는 왜 살아있을까요.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저는 무얼 해야 할까요. 일면식도 없고 인연이랄 것은 더더욱 없는 어떤 이의 죽음 앞에서 저는 왜 이다지도 욕되게 살아남은, 죄스러운 생존자가 되고 마는 걸까요.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마저도 때로는 부끄러워집니다. 제가 뭐라고...
우선은 오스카 아빠의 모래 알갱이 이야기에 기대어볼까 합니다. 오스카의 아빠, 토머스 셸씨가 "네가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그때까지 흘러왔던 대로 죽 진행되었을 테지."라고 했으니까요. 그건 제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까지는 바라지 않고요. 저의 삶에서 이 모래 알갱이 하나를 옮기는 일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거라 믿어볼까 봐요. 아무리 무의미하고 무용해 보이더라도 제가 거듭 그 모든 죽음을, 저의 죄스러운 마음을 톺아보고 고민하는 시간들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겁니다.
오스카는 본격 모험을 떠났습니다. 블랙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정말로 한 명씩 다 만날 작정인 것 같아요. 벌써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들 한 명, 한 명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모두 써버리는 건 욕심 같아 속으로 삼킵니다.) 블랙이라는 이름의 주소만 216개였던가요. 216명의, 아직까지 살아있을 고유한 생명들을 더듬어보며 모래 알갱이 하나를 옮겨보기로 합니다. 다시 또, 편지할게요.
(추신) 동명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같이 영화도 볼 수 있기를 바라요.
밤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