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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May 09. 2024

에세이: 드레스 한 벌의 추억

내 옷장 속 웨딩드레스



안 방 옷장 오른편 가장 안쪽에는 새하얀 웨딩 드레스 한 벌이 걸려있다. 웨딩 촬영 때 입었던 두 벌의 드레스 중 한 벌을 구매했다. 기다랗게 떨어지는 길이 탓에 드레스 아랫단은 항상 수습하지 못한 여우 꼬리처럼 어수선하게 늘어져있지만 옷장을 열 때마다 존재 그 자체로 나를 미소짓게 만든다. 특별히 고급 소재로 만들어진 웨딩 드레스도 아니고, 거창하게 화려한 디자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게는 결혼식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한 벌의 옷, 아니 일종의 전리품인 셈이다.



별도로 결혼식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었던 것도 아닌데,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결정을 하자마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열정의 흐름을 막을 길이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결혼을 했다는 인증에 그칠 단발성 행사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또 일생에 단 한 번 뿐인 엄청난 사건일 수도 있는 결혼식. 내게 결혼식은 내 머릿속 그림들이 하나하나 현실로 피어나는 과정이었다.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남편과 양가 부모님의 지지, 응원 덕분이기도 했다. 



결혼식 이후 액자처럼 옷장 안에 걸려있기만 하던 그 웨딩 드레스가 딱 한 번, 옷장을 탈출한 일이 있다. 임신 8개월, 만삭 사진을 찍을 때였다. 등 쪽에 코르셋 형태의 끈 장식이 있어 자유자재로 디자인을 늘리고 줄이는 게 가능한 드레스였다. 만삭 사진 속, 가슴 아래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배를 따라 자연스럽게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옷감의 굴곡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드레스를 구매할 당시만 해도 만삭의 배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결혼 후 몸매 변화를 가늠할 수 없다는 이유로 두 벌 중에 선택한 것이었는데(한 벌은 매우 타이트한 디자인이었다), 결과물을 놓고 보니 매우 흡족해서 1년 전의 내 엉덩이라도 힘껏 토닥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드랍고 하얗고 긴, 나의 전리품이자 보물같은 그 드레스는 오늘도 안방 옷장 한 켠을 지키고 있다. 나의 결혼식과 뱃 속 아이를 함께 기록한 그 드레스는 그저 한 벌의 옷 이상의 무엇이리라. 결혼 10주년까지 이제 2년이 남았다. 신혼때 부터 남편과 종종 10주년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하면 좋겠다는 농담을 했었다. 다시 웨딩 드레스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그 날, 드레스에는 또 무엇이 하나 더 담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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