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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죽음 Jun 03. 2024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오이와 함께 설렘

#13살 #초등교실 #설렘 


씨앗으로 심은 오이가 무럭무럭 자라나 통통한 오이가 열렸다. 

작은 페트병에 겨우 오이 씨앗을 하나 심었을 뿐인데 농부들의 정성을 아는 것인지 기특하게 오이는 잎을 내고 줄기를 뻗고 덩굴손을 주렁주렁 달고 열매를 맺었다. 


오늘은 아이들이 기다리던 오이 먹는 날. 


아이들은 매일 오이가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오이가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보며 언제 오이를 먹을 수 있는지 오매불망 기다렸다. 

열세 살의 아이들에게는 오이의 생명력보다 그저 저 오이는 무슨 맛일까를 연신 궁금해했다. 

작은 씨앗하나에 얼마나 생명력이 담겨있는지를 가르치고자 했던 마음은 욕심이었던가! 


"선생님, 우리 할머니가 그러는데 오이는 밤에 따야 한데요. 낮에 따면 쓰데요."

"정말? 그건 몰랐네. 그런데 우리는 밤에 딸 수가 없는데, 한번 먹어보고 판단해 보자."


작은 오이 하나를 26등분을 했다. 

작은 오이를 자를 때 과연 나눠 먹는 게 가능한지 의문하는 T들이 있으나 

선생님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지. 당연히 가능. 


오이를 자르자 싱그러운 향이 퍼졌다. 

잘린 오이를 들고 다니며 향을 맡게 하자 아이들은 설레어했다. 


"자, 지금의 기분을 시로 써보자." 


시를 쓰기 시작하며 마치 어미새가 된 듯 작은 오이를 입에 하나씩 쏙쏙 넣어주었다. 

"음~ 맛있네." 


오이를 먹고 시를 쓰랬더니, 다음 차례인 오이를 얼른 먹고 싶다는 이야기가 태반이었다. 

순수한 감성을 요구하는 시는 열세 살에게 무리인가? 

그렇다면 방법을 바꿔야지. 


"오이를 먹기 전에 너무 설레었듯 살면서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 

" 금요일 저녁이 설레어요. 한 주가 끝나가는 시간이기도 하고, 다음 날은 주말이니까요."

" 여행 가기 전에 너무 설레어요. 이번 주에 에버랜드에 갑니다. "

" 택배가 오기 전이요. 늦게까지 학원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택배상자를 보면 모든 피곤함이 싹 풀려요." 


그렇지 그럼. 주말과 여행과 택배라니. 어른에게도 설레는 일이지. 

그러다 어느 한 아이의 글을 읽고는 드디어 마음이 작게 일렁였다.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은 부모님의 '첫마디'이다. ]

아침엔 서로 정신이 없어 대화를 못하지만 서로 할 일이 모두 끝난 후 대화를 한다. 

사람과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오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서로 공감해 주며 대화를 하면 왠지 속이 시원하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 아빠한테 알려줘야지'라고 생각한다. 

친구와의 첫 만남도 늘 '말'로 시작된다. 

'안녕' , '오늘 있잖아...', '그게~' 

하루 동안 계속 말을 안 하면 어떨까? 

답답하고 내 기분이나 감정을 드러낼 수 없겠지? 

- 우리 반 학생 김**의 글 중




그래. 그거잖아.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의 시작은 

늘 '말'이었구나. 


작은 아이를 통해 삶의 반짝이는 순간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어떤 말을 하였나?

나를 

또 누군가를

설레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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