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누는 조각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 클레어 키건
일기처럼 생각을 끄적거리는 글만 쓰다 보니 책을 읽고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잊었다.
하지만 김하나 작가는 말했다.
“독서라고 하는 것을 어느 정도로 해석하고 상상할 것인지 그 자루는 결국 나한테 있다.”라고.
그러니 책을 읽고 멋진 서평을, 그러니까 타인이 보았을 때 멋있다는 판단을 내릴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은 한편으로 미루고 자판을 누른다.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펄롱은 문득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는데 찾아오는 불안함, 걱정
어디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은 의미 없는 날들의 연속
공허함은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하나의 시험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했는데도
한 발자국도 나아가고 있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마음은 흔들리게 된다.
펄롱은 태어나면서부터 없었던, 누군지 모를 아버지의 부재를 원인으로 생각한 듯하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보고 따를만한 존재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니까.
하지만 공허함을 이겨낼 줄 모르는 사람이 그렇듯 펄롱은 평소와 같은 생각으로 공허함을 지우려 했다.
실업수당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전기세를 내지 못해 추운 집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과는 달리 평범하고 큰 탈없이 유지되고 있는 삶을 잃을까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이 너무 커서 공허함을 누르고 그저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는 것을 선택하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한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아이는 수녀원에서 일을 하는 아이였다.
겉으로는 명맥 있는 학교를 운영하지만 또 다른 가난한 아이들은 수녀원의 돈벌이를 위해 세탁소 일꾼으로 더럽고 춥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수녀원의 석탄광에서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끔찍한 회색원피스를 입고 듬성듬성 머리카락이 잘려있는 아이들을 보게 된 펄롱은 16살에 자신을 낳은 어머니 역시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었음을 직감한다.
아버지는 부재했지만 미혼모가 된 자신의 어머니를 받아주고 자신을 키우고 가르쳐준 미시즈 월슨 덕분에 펄롱의 삶은 그 아이처럼 어렵지 않았다.
펄롱은 생각해 냈다.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사소해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들.
하지만 이내 삶을 이루었을 것을.
그리고 그 삶은, 미시즈 윌슨을 통해 받은 그 자비는
막달레나 세탁소의 한 소녀를 살리는 용기 있는 선택으로 펄롱을 이끈다.
마침내 펄롱은 자신을 괴롭히던 공허함에서 해방된다.
앞으로 벌어질 그 어떤 일에 대한 두려움을 기꺼이 마주하겠다는 마음으로.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을 읽다 보면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나만의 결론이다.
소설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늘 두 편으로 갈린다. 사랑이 있는 자와 사랑이 없는 자.
물론 그 사랑은 애틋한 연인 간의 사랑, 부모의 끝없는 헌신, 타인을 향한 자비, 선한 행동, 대가 없는 친절, 악에 대항하는 선택 등 다양한 모습을 띄고 등장하지만 그 본질은 늘 그러고도 괜찮은 넉넉한 마음이다.
펄롱 역시 미시즈 윌슨으로부터 받은 사소하지만 끊임없는 사랑 덕분에 직업학교의 가난한 소녀를 살리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행사용 조각상에서 마리아나 예수님이 아닌 당나귀 모형을 귀여워해주는 장면으로 보아 그 소녀도 앞으로는 사랑을 주는 아이로 살아가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전달되는 것이다.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사랑은 거대한 무엇이 아니야.
한 조각, 한 조각, 종국에는 내 삶의 한 판을 완성시키는 그저 작은 한 조각이야.
그리고 그 조각은 나눠야 하는 것이야.
오병이어의 기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