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전부다
어느 평범한 토요일, 마트를 다녀왔더니 식탁에 작은 국화꽃이 올려져 있었다.
커다란 꽃다발은 부담스럽지만 작은 꽃다발은 꽃꽂이도 편하고 화병에 꽂았을 때 그 모습이 참 예쁘다.
웬 꽃일까 싶었는데 작은 카드에는 딸아이의 메모가 적혀있었다.
‘지하상가에 꽃집이 많길래 생각나서 샀어요. 엄마 아빠가 집에 없는 건 계획에 없었지만. 하하
전도사님이랑 저녁 먹고 모임하고 올게요. 사랑해요.’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받는 선물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어준다.
게다가 평소 잘 표현 안 하는 고등학생 딸아이의 선물이라니.
평일에는 학원 갔다가 늦은 밤에 돌아오니 얼굴 볼 사이도 없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또 집에서는 잠만 자는 딸아이가 아마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나 보다.
엄마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려고 했든지 정말 갑자기 그러고 싶어서 샀던지 간에 누군가를 위해 꽃을 사는 행위는 꽃보다 예쁘다. 참. 행복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집은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 세탁기를 돌리는데 겨우 세 식구가 살지만 수건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 잔뜩 쌓인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으면서 연신 시계를 쳐다보았다. 추가 탈수까지 하려면 적어도 2시간은 넘게 걸리는데 세탁이 다 될 때까지 졸음을 참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서 쉴 새 없이 일을 몰아쳐서 한 날이면 집에 오자마자 밥도 먹지 않고 눕고 싶은 마음만 든다.
겨우겨우 탈수를 끝내고 세탁물을 건조대에 걸면서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 오늘 학부모 상담을 두 건이나 했어. 네가 같이 해주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같이 빨래 좀 널어줄래?”
게임을 하다 말고 아들이 빨래를 함께 널어주었다. 넌지시 분리수거를 좀 하고 올 수 있는지 물었다.
“엄마, 내가 종이박스 버리고 올게. 엄마는 자.”
내가 버리기에도 버거운 커다란 박스를 아이는 번쩍 들고나갔고 그 사이에 나는 침대에 곯아떨어졌다.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도 참고, 사춘기 호르몬의 귀찮음도 참으며 가족을 위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아들을 보며 공부 좀 못하면 어때. 엄마 도와줄 줄 알면 되었지. 그렇고 말고.
‘엄마의 피곤함을 알아주는 아들 덕분에 일찍 잘 수 있어서 참 좋구나!’
일요일마다 지방으로 내려가는 남편은 출발하기 전에 늘 국을 끓여준다. 어떤 날은 김치찌개. 어떤 날은 순부두찌게. 보통은 미역국을 끓여준다. 아이들도 나도 월요일 아침은 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고 등교를 할 수 있다. 요즘은 내가 무언가를 끓여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남편이 먼저 메뉴를 정해서 해주고 가기도 한다.
남편이 끓여준 요리를 먹으며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다.
“역시, 엄마보다는 아빠지.”
“김치찌개는 이틀째가 훨씬 맛있어. 왜 그럴까?”
“순두부찌개는 너무 매워. 다음에는 덜 맵게 해달라고 해야지.”
남편의 빈자리에서도 아이들은 아빠가 남기고 간 흔적을 찾고 그 구멍을 음식으로 메꾸는 것이다.
‘따뜻하고 넉넉하고 맛있게 잘 먹었어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 스즈메의 문단속이라는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주인공은 지진을 일으키는 거대한 힘을 막기 위해서 문을 닫아야만 한다. 문을 닫으면서 주인공이 주문을 외우는데 그 주문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야 했다.
그 마음이란 우리 삶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등등
매일 사용했고 큰 의미를 담지 않았던 그런 말들은 사실 우리의 삶을 지속하게 했던 말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평범한 일상이 너무 귀하고 감사해서 영화를 보며 눈물이 났었다.
딸아이가 우연히 산 꽃 한 다발과 아들이 버려준 종이 박스. 남편의 미역국은 누군가에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다. 하지만 내가 꼭 지키고 싶고 언제까지나 갖고 싶은 소중한 삶이다. 사랑이 담긴 삶이 일상의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