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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PAPA Aug 19. 2023

멘탈이 강한 사람

V

악어.
반수생의 습성을 가진 파충류로 야생의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
하지만 다른 포식자들과 마찬가지로 새끼 때는 약하기 그지없다.
갓 태어난 새끼 악어는 20cm 언저리 정도에 불과하며,
심지어 일부 종들은 배가 고프면 동족도 잡아먹기에 어린 개체의 생존율은 더 낮아진다.
성체악어로 무사하게 성장하는 악어의 비율은 1% 미만이다.

(자료출처 : 나무위키 & 내셔널지오그래픽)


V는 내가 직전에 모셨던 담당 임원이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그는 더 이상 조직의 담당 임원이 아니기 때문.

발령이 난 다음 날.

직원들이 사무실을 떠난 후 비서와 다른 남자 선배 한 명과 그의 사무실의 짐 정리를 맡았다.

애써 웃고 있지만 착잡해 보이는 그를 마지막 악수와 함께 먼저 떠나보내고,

빈 그의 사무실을 보고 있으니 뭔가 복잡 미묘한 감정이 꿈틀대었다.

그가 떠나는 게 아쉽거나 슬퍼서는 아니었다.

그를 담당 임원에서 내린 회사의 판단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다만 회사에서 직책이라는 껍데기를 벗은 한 사람의 초라한 일면을 마주하무언가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별명은 '도련님'이었다. 

단단해 보이는 풍채, 선이 굵은 얼굴, 신뢰감을 주는 중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차분한 성격. 

예전에 모셨던 많은 임원들처럼 권위적인 성격의 사람은 아니었다.

늘 온화한 미소에 불필요한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발령 후에도 평소와 달리 눈은 슬픈 표정이었지만 끝까지 감정을 억제하려 노력하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그가 부임하기 전 예전에 그와 접점이 있었던 X선배 등은 모두 그를 '좋은' 선배님이라고 아주 짧게 평했었다.

그를 겪어보니 나 또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회사에서 그만큼 멋진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부서에서도 이야기가 나올 만큼 업무적으로는 일에 대한 주도성이나 추진력이 낮았다. 

위에서 급히 찾는 것만 잘 대응하자는 것에 주로 초점이 맞춰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 밑에서 일하는 것이 편하지만 발전이 없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위에서 먼저 지시를 내리지 않은 업무에 대한 진행에 대해서는 하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애매하게 답변하거나 행동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그가 업무지식이 없거나 내용이 몰라서 답을 안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룹사에 네트워크도 많았고 가끔씩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 대한 통찰이나 지적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 방식이 상사로서의 직접적인 지시라기보다는 옆에서 코칭이나 훈수를 해주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늘 의아했지만 말이다.

느긋한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그도 회사에서는 나서지 않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그만의 생존전략이 고착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탕비실에 ○○파이 더 없나? 역시 사람들이 맛있는 건 귀신같이 알아요. 이게 왜 차별화되냐면..."

"아이유는 좋은 가수지. 가수는 음색만으로도 확실히 그 존재가 구분이 되어야 해. 가수는..."


업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는 그의 기호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제지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발화량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남들과 호환이 잘 안 되는 독특한 언행과 수다스러움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동네형이나 학교선배로 만났다면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내 고향으로 놀러 오면 제일 유명한 ○○국수 맛보게 해 줄게."


별명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대한민국의 동남쪽에 위치한 한 도시에서 자란 도련님이었다.

내 앞에서도 예전에 집안에서 구입한 고가의 회원이용권을 얘기한 적도 있었고, 

늘 고가의 차량이나 장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집안이 꽤 부유하고 예전 그룹의 윗선들과도 인맥이 있었다는 풍문도 있었다.

어쩌면 그의 느긋함과 온화함은 그런 성장배경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든든한 뒷배가 그가 회사 안에서 생존하고 커가는데도 분명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의 그의 인생에 대해서도 내 코가 석자이지 전혀 걱정할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Pixabay


예전에 그가 그룹의 복합프로젝트 담당으로 오랫동안 다른 곳으로 떠나 공백의 시간 때문일까.

아니면 그때의 그가 지금 더 고위직이 된 다른 임원들에게 다른 눈 밖에 난 행동을 했던 걸까.

그가 특이한 면은 있지만 특별히 모난 성격은 아니었음에도 회사 내에서는 특히나 윗선과 이상하게 관계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배경은 잘 모르지만 이제는 그가 끈이 떨어진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언제든 잡아먹힐 수 있는 위치로 변했던 것일 수도 있다.


"괜찮아. 괜찮아. 회사 생활이란 게 이런 면들도 있는 거야. 동요하지 말고."


발령이 사내에 공식게시된 날. 

그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집무실로 사람들을 모아 괜찮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면 괜찮다는 말을 굳이 여러 번 하지 않을 텐데, 

그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려 노력하지만 많이 동요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임원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온라인에서 '임원 승진 확률'을 검색하면 글로벌 헤드헌팅 전문 기업 유니코써치가 수행한 조사결과와 언론사 자료들이 나온다.

국내 100대 기업의 공시자료 상의 미등기임원을 전체 직원 수로 나누어 계산을 해보면

2022년 기준으로 직원 120.9명 중 단 1명 꼴로 임원이 된다고 한다.

비율상으로는 약 0.8%이다.

얼마 전 TV에서 본 야생에 사는 악어의 생존확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지 출처 : 조선일보, 22년 11월 8일 기사]


악어로 태어났어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강한 성체가 될 수 있는 확률은 1% 미만이다.

회사에서도 엄청난 열정과 의지를 가지고 모두가 입사하지만 임원이 될 확률은 지극히 낮다.

모든 임원이 대단하고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자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고와 생존의 시간들을 거쳐왔음은 분명하다.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순히 남들을 무조건 제거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독기로 가득 차지 않으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나이길 바라는 나를 잃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앞으로도 일하다가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도움을 구해. 도와줄게."


그가 임원직을 내려놓으며 마지막으로 나에게 따로 해준 말이었다.

그가 자랑하던 그의 고향에서 여름 전통음식을 같이 먹어볼 날이 올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그가 준 진심의 온정을 기억하며 회사 근처에서라도 올여름이 끝나기 전 자리를 한번 마련해볼까 한다.


며칠 전 절친한 친구가 나에게 해준 말을 마지막 메시지로 전하며.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
나는 희망한다. 당신도 희망하길.
살아 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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