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 박물관 vs 알베르티나
어제 새벽 1시 즈음 확인해 본 둥이의 체온은 여전히 높았다. 38도가 찍히는 순간 아내를 깨웠다. 좌약을 넣기 전 탈수 방지를 위해 소량의 분유를 먼저 먹이고 좌약에 로션을 바른 후 아기의 항문에 투입한다. 졸린 와중에도 버둥거리기 시작한다. 소화도 시킬 겸 안아주는데 잠시 후, '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진다. 응가를 했는데, 왠지 설사 느낌이다. 아내는 순식간에 검색을 해 본다. 좌약이 대장 점막을 자극해 설사가 날 수가 있다고 한다. 당장 사진을 찍고 어제 다녀온 병원에 메일을 보낸다. 피곤할 테니 내일 아침에 해도 되지 않냐라고 해도 아내는 고집이다. 이럴 땐 역시 엄마가 대단하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둥이는 많이 울지 않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재본 둥이의 체온은 37.5도, 조금 애매하지만 일단 약은 넣지 않고 저녁까지 상황을 보기로 한다.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주문을 외운다. 다행히 이후 둥이의 체온은 안정화되어 37도에 머물렀다.
아내의 제안으로 오전~점심시간을 이용, 내가 자유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자연사박물관, 그리고 여유가 더 있으면 에페소스 박물관Ephesos Museum을 가기로 계획했다. 아무런 짐 없이 가볍게 가죽 자켓을 걸치고 나와 우중충한 빈의 거리를 걷고, 버스를 탄다. 아내가 메시지를 보낸다. "자유시간 만끽하고 와~". 자유로우면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 다 회복하지 않은 둥이와 아내를 집에 두고 나오는 것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쌀쌀한 빈의 가을거리를 걷는 발걸음은 가벼웁다.
자연사박물관에 도착했다. 여기는 오디오가이드에 한국어 버전이 없다. 아쉬운 대로 영어 버전을 빌리고 이어폰을 꽂는다. 생각보다 볼륨이 너무 낮게 세팅되어 있어 오히려 이어폰보다 자체 스피커를 귀에 밀착시켜서 듣는 것이 더 크게 들릴 때가 많다. 그래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 것이 편해서 귀를 쫑긋, 최대한 집중해 본다.
어제 한 바퀴 가볍게 돌았으니 오늘은 오디오 가이드에 나온 항목 위주로 투어를 진행한다. 1층은 지구와 우주의 역사, 2층은 다양한 동물의 표본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선 1층의 돌덩이 파트는 가볍게 보고 지나간다. 나는 돌덩이들은 크게 매력을 못 느꼈다. 대신 운석관부터는 아주 흥미롭게 관찰했다. 가장 아름다운 운석(隕石, 별똥돌, Meteorite) 중 하나인 Cabin Creek의 매혹적인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해 본다. 나는 항상 '우주'의 신비로움에 이끌렸다. 지금 일하고 있는 직장을 선택하게 된 배경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우주에 끝이 있을까란 질문을 한참 붙들고 살았던 기억도 있다. 결국 그 질문이 나를 지금의 직장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앞으로의 나의 길들도 어떻게 이어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심지어 나 조차도. 인생은 어차피 원하는 대로 펼쳐지지 않는다. 철저한 계획 따위 세우지 말고, 그저 열심히, 열심히 살아보자. 그리고 이어지는 고생물학 파트는 오늘도 역시 흥미로웠다. 생물 진화의 역사가 가득한 공간들이다. 선사시대(Prehistory), 즉 문자 발명 이전 원시 예술을 상징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도 오랫동안 감상해 본다. 오늘 방문으로 자연사박물관NHM 2회차이다. 살아 생전 이 작은 보물을 또 내 눈에 담을 날들이 있을까? 빈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한번 더 보러 아내와 같이 와야겠다 다짐한다.
(*참고로 구글 Art&Culture 프로젝트에서 NHM Top100을 볼 수 있게 만들어놨다. 구글 최고. 다음 링크 참고하시라. https://artsandculture.google.com/story/nhm-top-100-natural-history-museum-vienna/7gVRTudJ25J7IQ?hl=en)
이렇게 1층에서 약 2시간여를 감상하고 오디오 가이드 Top 100개 중 나머지 절반 정도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동물 박제가 압권이다. 특히 재미난 방식으로 전시해 놓은 것들이 많아 흥미로웠다. 전시창을 뚫고 올라와 있는 도마뱀, 하늘에 떠 다니는 오징어 떼들, 벽을 기어올라가는 거미들, 매머드를 사냥하기 위해 허공을 가르고 있는 창들 등등, 상상력을 다양하게 창의적으로 자극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그럴까, 어린 친구들이 가족들과 함께 온 경우도 많았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생님들이 애기들을 이끌고 다니며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있었으며, 생각보다 흥미로운 자세로 집중하며 관람하는 현지 중학생 무리들도 많이 보였다. 좋아하는 일에 애정을 쏟다보면 이런 완성도 높은 작업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생각은 또 '나'에게로 흐른다. 내 일에는 어떻게 적용하면 될까?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 회사를, 내가 일하는 공간을, 어떻게 더 창의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한숨이 나올 때가 대부분인 회사의 현실이지만, 그래도 내가 애정을 쏟는 대상임엔 분명하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가볍게 대할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
밖을 나오니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생각보다 날씨가 좋지 않고, 둥이와 아내의 컨디션도 걱정돼서 에페소스 박물관을 가지 않고 바로 들어가기로 한다. 가는 길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황급히 어느 카페 차양막 안으로 들어가 서 있는데 비는 점점 거세어지는 것 같았다. 얼른 구글리뷰 평점을 확인해 보니 4.9점. 바로 들어가서 카푸치노 한잔을 시킨다. 그런데 주문을 받던 직원이 "커피 한잔만? 다른 건 더 안 시켜?"라고 해서 내가 "응, 커피 한잔만."이라고 하니, 계속 나중에 시킬 거냐며 묻는다. "Maybe later, but not now."라고 했고, 그제야 "Okay."라고 주문을 받아간다. 뭔가 살짝 짜증이 나려고 했는데 딱 그 직전에 멈췄기에 그래도 기분이 많이 나쁘지는 않았다. '정말 커피 한잔만 시키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고, 좀 찝찝하긴 했다.
아, 참고로 빈의 카페에서 가장 '빈'스러운 커피는 멜란지(Melange)라고 한다.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우유를 1:1로 넣고, 부드러운 우유 거품을 올린 것이다. 은색쟁반에 물 한잔과 함께 하얀 잔에 나오는 것이 가장 전통적인 방식이다. 이 외에도 브라우너와 아인슈패너 등이 있지만 옛 시절, 예술가들이 빈을 가득 채웠던 그 시절의 빈을 느끼려면 이 멜란지가 제격인 것 같다. 멜란지는 젤레니크에서도 마셨고, 라떼는 마린에스프레소바에서 마셨고, 오늘은 카푸치노를 마셨다. 일부러 이런 커피+우유 조합들로만 마셔봤는데, 아무래도 나는 커피에는 그리 큰 감흥이 없나 보다. 내겐 다 비슷하게만 느껴졌다. 에스프레소에 적당히 우유 섞고 부드러운 크림이 얹어진 맛있는 커피, 딱 이 정도 감상이었다.
그래서 다음번엔 우유가 안 ― 들어가거나 적게 ― 들어간 커피로 마셔보려고 한다. 그 대표 격인 커피로는 브라우너Brauner, 아인슈패너Einspänner 정도 일 것이고 추가로 슈바르처Schwarzer 정도가 있다고 한다. 브라우너는 에스프레소에 우유가 아주 소량만 들어간 것이고, 아인슈패너는 우리네의 그것과는 다르게, 달지 않은 무가당 휘핑크림을 더블 에스프레소에 얹은 것이다. 슈바르처는 아메리카노보다 양이 적고 더 진한 커피라고 보면 될 것이다. 아, 아인슈패너는 카페 젤리넥에서 마셔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좀 더 다양한 버전의 아인슈패너를 마셔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짧게 커피를 홀짝거리고 비가 그친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는 아내의 시간이다. 오늘은 수요일이고 알베르티나 미술관이 야간 개장(21시까지)을 하는 날이다. 지난번에 셋이서 갔었으나 둥이의 컨디션 난조로 빠르게 나와야 했었기에 오늘 아내의 초이스는 알베르티나였다. 둥이는 나랑 잘 놀고, 잘 자고, 잘 먹으며 시간을 보냈고 아내 역시 여유롭게 알베르티나를 즐기고 돌아왔다.
이렇게 하루가 또 저물어 간다. 벌써 빈에 도착한 지도 15일째라니, 시간이 정말 빠르단 것을 새삼 깨달으면서도 이제야 좀 이곳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무표정 속에 감춰진 둥이를 향한 미소들도 확인했고 티켓 확인 없이 버스나 트램을 타는 것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이제 티켓을 넣고 타는 것이 불편해질 것 같다. 빈의 생활상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 정리를 한번 해봐야겠다.
오늘은 나와 아내, 그리고 둥이 모두의 컨디션이 좋은 하루였다. 이제 남은 기간 동안은 제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둥이도 오늘 훨씬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었으니 내일쯤이면 다 나을 것 같다. 내일 되면 아픔은 다 잊고 다시 건강해진 모습으로 엄마 아빠를 향해 빵긋빵긋 웃어주렴 둥이야.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잘 자고 좋은 꿈 꾸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