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urStellar Nov 23. 2023

마지막을 아름답게

나의 물건 떠나보내기

눌러도 바람만 나올 뿐 더 나오는 것은 없다. 할 수 없이 아랫부분에서 두 손가락으로 힘주어 밀어 올렸더니 겨우 삐죽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칫솔에 바른다. 아침 일찍 학교 가는 아이를 위해 새 치약을 갖다 놓아야겠다. 안 나오는 치약을 붙들고 1초도 바쁜데 그럴 시간이 없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한 단계가 더 남았다.

가위를 찾아 과감하게 치약의 허리를 가른다. 다 썼다면 그냥 고이 버릴 것이지 이렇게 허리까지 잘라야 하나라는 치약의 외마디 비명이 들리는 듯 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한다. 아니 오히려 내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흐른다. 갈라진 치약 안을 슬쩍 본다. ‘흠! 몇 번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겠군.’ 치약 통 벽에 붙은 치약이 마를 수 있어 잘린 몸통 두 개를 끼워 칫솔꽂이 옆에 둔다. 남은 치약을 쓰는 동안 나는 은근히 그 치약을 쓰기 위해 양치질 때를 기다릴 것이다.


다 쓴 생활용품은 단지 치약뿐이 아니다. 겨울철에 많이 쓰는 보디로션은 통도 크고 두께도 두꺼워 가르는 일이 쉽지 않다. 자칫 잘 못하면 손을 다칠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 노동에 맞게 통 속에 남아 있는 양이 많다. 역시 어려운 일에는 그만큼 보답이 있을 때 보람을 느낀다. 남은 양이 너무 많아 그냥 펌프로 눌러쓰는 양과 펌프로 로션이 나오지 않아 갈라서 쓰는 양이 거의 같지 않겠냐는 생각도 든다. 펌프 방식이 편하기는 한데, 잔류 양이 많다는 단점이 다. 우주 정거장 만드는 것보다 남지 않는 튜브나 통을 만드는 게 더 어려운 모양이다.


내 연배의 남성들은 그다지 피부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 역시도 그러다가 최근 들어 매일 썬 크림을 바른다. 햇빛이 노화의 주범이라는 말을 워낙 많이 들은 지라, 이제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다양한 썬 크림이 매장에 있지만, 할인하는 제품들은 대부분 밝은 색상이 많아 아무래도 거북했고, 문제는 지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딸의 추천으로 색상도 없고 잘 지워지는 썬 크림을 골랐는데 생각보다 비쌌다. 그래도 피부를 관리한다는 큰 사명을 가지고 지금까지 꾸준히 사용하고 있다.

크지도 않은 튜브에서 선크림보다 바람이 더 많이 나오기 시작한다. 또 돈 달라는 이놈의 역성에, 마음에 부아가 살살 올라온다. 괘씸한 마음에 이 놈의 허리를 가르리라. 가위를 가져와서 냅다 허리를 자른다. 아프다는 비명도 없이 튜브가 두 동강이 났다. 튜브의 아랫부분에 손가락을 넣어 훑는다. 어라? 너무 많은 선크림이 묻어 나온다. 다시 조금 튜브에 덜어 놓고 모자라서 못 바른 얼굴 부분에 바른다. 이것으로 오늘의 얼굴 썬 블록은 완성.

두 동강이 난 튜브를 마르지 않게 끼우면서, 안에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본다. 튜브의 아래 부분보다 뚜껑이 있는 윗부분에 크림이 몰려 있다. 마지막까지 싹싹 닦아서 쓴다면 적어도 1주일은 쓸 수 있겠다. 썬 크림을 사는 것을 며칠 미룰 수 있을 것 같다. 뭔가 많은 것들을 공짜로 얻은 것 같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이런 행운을 덥석 받아도 되나라는 생각이 든다.


‘선크림아, 고마워. 마지막까지 이렇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 줘서. 너의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다 쓰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해.’


나의 썬 크림 바르는 1주일은 조금 더 행복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