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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rStellar Feb 11. 2024

어김없이 오는

- 공존하는 세상

여기는 눈이 귀한 곳이다. 그래도 예상 밖에 한 번씩 함박눈이 내려 이곳 아이뿐 아니라 어른까지 마음을 설레게 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기억도 까마득하다. 여기서 겨울 눈 구경하는 기대는 이미 눈 녹듯 사라졌다. 따뜻한 겨울, 지내기는 좋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다. 그나마 한 번씩 몰아치는 한파가 지금이 겨울인 것을 일깨워 준다.


이상 고온에도 겨울 소식이 왔다. 하나, 둘 산책길에서 겨울 전령사를 발견하면, 쌀쌀해진 날씨를 갑자기 느껴 몸을 움츠린다. 점차 수가 늘기 시작하면, 계절이 겨울로 확연하게 접어들었구나 생각한다. 높은 기온 때문에 겨울이 시작되는 것도 잊을 뻔했는데, 그들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겨울이 늦어진다 싶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때를 알고 나타났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흐린 춘천과 수영강 하류에는 언제 날라 왔는지, 제 집인 양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철새의 귀환은 마음 한 구석의 불안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혼자 위로해 본다.


찬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날아오는 것은 원앙이다. 화려한 몸단장을 한 원앙은 짝을 이루어 바다보다는 좁고 얕은 하천을 다닌다. 몇몇이 무리를 지으면서 헤엄을 치는 모습을 보면 원앙이 왜 금실이 좋은 부부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암수 서로 특별한 행동은 없지만 같이 물 위를 세련된 모습으로 품위 있게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비록 날짐승이지만 우리네의 남녀 사랑을 이입하고 싶다. 천연색 깃털의 어미 뒤에 아직 털이 복실한 새끼 몇 마리가 앙증맞게 따라다니면, 감정은 더 증폭된다.


원앙이 겨울 철새의 첫 신호를 끊지만 그렇게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산책 길에서 즐거움을 주었던 원앙이 보이지 않아 어디 있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다 보면, 조용하던 물길에는 어느새 다양한 오리들로 북적이고 있다. 산에서 흘러내린 춘천이 바다로 이어지는 좁은 물길에는 원앙은 보이지 않고 몇 종의 오리 새로 가득 찬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머리 색이 찬란한 청둥오리이다. 그렇지만 청둥오리는 그렇게 많지 않고, 검은색과 갈색의 오리들이 대부분이다.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몸을 앞으로 기대고 물 위에 노는 오리들을 본다. 좁은 물길이 오리들로 북적인다. 눈에 띄는 청둥오리, 갈색 오리, 검은색 오리. 검은색 오리는 한 종류인 것 같다. 몸 전체가 검은색인데 부리가 하얀색이라 더 도드라져 보인다. 반면, 갈색 오리는 자세히 보면 한 종이 아니고 다양하다. 온몸이 갈색인 쇠오리, 머리는 짙은 갈색이지만 몸은 회색인 흰 죽지, 짙은 회색의 머리와 흰 목을 가진 고방오리 등등. 이름을 다 알 수 없지만 자세히 보면 같은 오리가 아니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개의치 않고 무리를 이루어 부지런히 부리로 물풀을 뜯고, 자맥질을 하여 물고기를 잡고, 헤엄치고 저 할 일을 한다. 북적거리는 물 한쪽에 있는 돌 위에는 회색의 멋쟁이 왜가리가 한 쪽다리를 접은 채로 먼 쪽을 보고 있다.


바람이 좋고, 햇살이 고운 날. 멀리 산책하러 간다. 다리를 건너 수영 강변을 따라 걷는다. 수영강은 부산의 수영구와 해운대구를 가로질러 바다로 이어지는 하천이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수영만에 광안대교가 위로 지나간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어디서 강이 끝나고 어디에서 바다가 시작되는지 알 수 없듯, 새들도 강과 바다를 가리지 않는다. 바다 주변에서 보았던 까만색 흰 부리 오리가 때를 지어 수영강가에서 놀고 있다. 이 놈은 다른 오리들보다 체구가 작다. 그런데도 어찌나 부지런 한지, 쉴 새 없이 하얀 부리를 놀리고 있다. 강 주변의 돌에 붙은 먹이를 쉴 새 없이 다다닥 뜯어먹기도 하고, 자맥질하여 물고기 사냥을 한다. 물속으로 머리를 처박으면 앙증맞은 작은 엉덩이가 하늘 쪽으로 쏙 드러난다. 숨을 많이 못 참는지, 아니면 물고기 사냥을 해서 올라오는지 그리 길게 물속에 있지는 않다.


물속 사냥의 명수는 뭐니 뭐니 해도 가마우지다. 가마우지는 오리류 철새보다 날렵하게 생겼기 때문에 쉽게 구분된다. 오리들은 모여 다니지만 가마우지는 외톨이로 다니는 것 같다. 강이나 바다 중간중간 혼자 둥둥 떠 있다. 그러다가 물속으로 자맥질하면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길을 걷다가 가마우지가 물속에 들어가 얼마 동안 있는지 손가락을 꼽으면서 시간을 재어본다. 시간을 재면서 괜히 나도 숨을 참는다. 내 숨이 다 할 때까지도 가마우지는 물 위로 나오지 않는다. 한 참을 지나도 나오지 않아 이렇게 오래 있지 않을 텐데 하면서 그 주변을 살펴보면 어느새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헤엄치고 있다. 들어간 곳에 한참 떨어진 곳에 나온 것을 보면 물속에서 얼마나 먼 거리를 헤엄치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날렵하고, 혼자서도 기죽지 않고 또랑또랑한 가마우지를 보면 왠지 얄밉다는 생각이 든다.


철새에 대해 특별한 지식이나 관심이 없더라도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무던한 사람이라도, 날이 따뜻해지면 철새들이 사라지고 몇 안 되는 텃새들만 남는다는 것쯤은 안다. 춥지만 햇볕이 좋은 날 바다 모래 해변에 점점이 줄지어 있던 하얀 갈매기가 없어지고, 회색 비둘기만 남는다. 강과 바다, 그곳에 텃새들이 살고, 때가 되면 철새들이 오고, 바닷물 온도가 높아지면 또 어딘지는 모르지만 멀리 날아간다. 



총 천연색 인쇄물이 드물었던 어린 시절, 달력은 색상에 목말랐던 아이들의 눈요깃감이었다. 화려하게 인쇄된 달력에는 강이 흐르고, 강에는 백조가 헤엄치고, 강 주변에는 화려한 색상의 꽃들이 피었고, 아이는 강가에서 놀고, 어른은 벤치에 앉아 있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세상이었다. 우리와 차원이 다른 세상, 그런 세상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눈으로 보기까지는. 달력 아래 작은 글씨로 알 수 없는 나라와 지명이 적혀 있었지만, 거기는 우리와 다른 별세계거니 생각했다. 달력 안의 세상은 달력에만 존재하던 알 수 없는 그저, 외국이이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깊은 산속 저수지에서 오리새를 볼 수 있었다. 엄연히 사람과 동물은 같이 있을 수 없었다. 사람이 가면 새와 동물은 날아가거나 도망쳤다. 가까이 있는 들짐승, 날짐승은 왠지 잡아야 한다 생각했다. 가축이 아닌 이상,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 없었다. 함께하는 공간에서의 공존, 그것은 달력 그림처럼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강의 물 높이가 높다. 바닷물이 만조인가 보다. 강 주변을 따라 오리들이 유유히 헤엄친다. 강 가운데 섬과 같은 작은 돌에는 은회색 왜가리가 몇 마리가 멋진 폼을 재고 서 있다. 한 놈의 입에는 사냥한 물고기가 펄떡인다. 그런데도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죽은 듯 서 있다. 강의 고요함을 즐기는 것인지. 자전거 무리가 지나간다. 길을 따라 바람이 쫓아간다. 곧 봄이 오면 강 주변 나무에는 물이 오르고, 꽃들이 하나 둘 피고, 강과 바다에서 놀던 철새는 날아갈 것이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오면 어김없이 그들은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그들을 나는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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